예술가의 공간

폴 고갱(Paul Gauguin)이 머물던 공간들 프랑스, 폴리네시아, 타히티

magicalelf 2024. 3. 21.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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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국적인 섬 '타히티'로 여행을 떠나볼까 합니다. 열대지방의 풍경과 원주민을 신화적으로 묘사하는 '폴 고갱(Paul Gauguin)'의 이야기입니다.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은 프랑스의 탈 인상주의화가입니다. 생전에는 그리 평가받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인상주의를 벗어나 종합주의 색채론에 입각한 작품을 남긴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10여 년을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Polynesians ) 남태평양의 따뜻한 섬 '타히티 (Tahiti) ' 에서 생활하며 작업하였고, 그 시기의 작품이 대표작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나 '앙리마티스(Henri Matisse)'와 같은 프랑스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앙리 마티스'의 그림과 공간에 대해서는 앞서 이야기한 바가 있습니다.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2024.03.06 - [예술가의 공간] -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가 머물던 '프랑스 니스(Nice)' 그리고 그의 공간을 담은 그림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가 머물던 '프랑스 니스(Nice)' 그리고 그의 공간을 담은 그림

최근의 이야기들이 프랑스에 빠져있죠. 이번에는 프랑스의 색채화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얼마 전부터 국내에서 앙리마티스의 그림이 꽤 인기를 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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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이 세상을 떠난 뒤 파리의 아트딜러 '앙브루아즈 볼라드'는 그의 유작을 가지고 두 번의 전시를 파리에서 개최하였고, 그제야 그는 명성을 얻게 됩니다. 고갱은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로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판화, 도예, 저술 등 다방면에서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의 화풍은 클루아조니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대표작들의 주제는 원시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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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Paul Gauguin)은 1848년 6월 7일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사업가집안 출신의 언론인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판화작가 할아버지와 사회주의 사회주의 활동가였던 할머니의 딸이었는데, 폴 고갱은 외할머니를 이상화하며 그녀의 저술을 평생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의 가족은 1850년 아버지의 기고문으로 인해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고 페루로 이주했습니다. 그 시기가 고갱에게는 생애 가장 풍족하고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해요.

 

경제적인 상황과 배다른 귀족형제 가문의 괴롭힘으로 인해 프랑스의 '오를레앙', 그리고 '파리'로 이주해 살았고, 이후 고갱은 학업과 군복무를 거쳐 파리지앵 증권중개인으로 11년을 근무했습니다. 1873년에는 덴마크 출신의 메테 소피 가드와 결혼도 합니다. 그 시기 고갱은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882년 파리 증권시장이 붕괴하면서 수입이 없어진 그는 그때 전업화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1884년 고갱의 가족은 코펜하겐으로 이주했습니다. 생계를 위해 다른일을 하기도 했지만 잘 되지 못했고, 결국 그의 아내는 그에게 떠나 달라 요구하며 그의 11년 결혼생활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1885년 고갱은 그렇게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아래 그림은 그의 아내와 아들의 초상화입니다. 그리고 덴마크 코펜하겐 (New Carlsberg Glyptotek Copenhagen Denmark)의 집과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의 가족이 담긴 그의 그림입니다. 

1. Paul Gauguin, Madame Mette Gauguin in Evening Dress - Fru Mette Gauguin - Nasjonalmuseet, 1884 / 2. Paul Gauguin, Portrait of Madame Gauguin, 1878
Paul Gauguin,Clovis, 1886
Paul Gauguin, Interior of the Painter's House, rue Carcel, 1881
Paul Gauguin, Still Life of Onions and Pigeons and Room Interior in Copenhagen 1885
Paul Gauguin, Garden in Vaugirard (The Artist's Family in the Garden in rue Carcel, Paris), 1881

 

전업작가로 활동하며 1886년 여름은 브르나튜반도의 '퐁타벤( Pont-Aven )'에서 보내며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그 시기 그곳에 젊은 화가들이 몰려들었는데, 그들의 모임을 주도하는 이는 '찰스라발'이었습니다. 그는 고갱에게 '파나마( Panama)'와 카리브해에 위치한 '마르티니크(Martinique) 셍피에르(St. Pierre)'의 이국적 풍광에 대해 이야기하는걸 즐겼다고 합니다. 고갱은 그의 권유대로 그곳을 여행하며 지냈고, 그 시기 아프리카와 동양의 미술이 갖는 강렬함에 끌려갔으며, 상징주의를 내세우기 시작합니다.  이후 고갱은 민속예술과 우키요예( Ukiyo-e, Ukiyoe , (부세회) )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 클루아조니즘( cloisonnisme )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화풍을 더욱 밀어붙여 종합주의를 발전시킵니다. 종합주의는 화면을 구성하는 각각의 색이 모두 동등한 역할을 맡는 것을 지양합니다. 어느 하나가 주가 되고, 다른 것은 부수적인 것이 되는 형태를 거부하는 사조입니다. 

1.폴 고갱, 과일과 레몬이 있는 일상, 1880무렵 / 2. 폴 고갱, 머리모양의 물병과 일본 목판화가 있는 일상, 1889

 

폴 고갱, 라발의 프로필이 있는 정물( Nature morte au profil de Laval), 1886

 

고갱과 친구 라발은 파나마 Panama)와 마르티니크 (Martinique)의 셍피에르(St. Pierre)에 체류하면서 "껌둥이 움막"이라 일컫는 원주민들의 장소를 들락거리며 관찰하기도 했으며, 생피에르 (St. Pierre)에서는 20점가량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특히 마르티니크 (Martinique)에 정착한 인도인들의 힌두교 상징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마르티니크 (Martinique)에서 그린 그림 가운데 완성한 것은 11점이라고 합니다.  

폴 고갱, 《숲 속의 움막》, 1887년

 

폴 고갱, 마르티니크의 오두막, 1887



마르티니크 (Martinique)의 폴 고갱 박물관 Centre d’Interprétation Paul Gauguin (ancien Musée Gauguin)

주소: Anse Turin, Le Carbet 97221 마르티니크

 

현재 마르티니크에는 폴 고갱이 1887년에 섬에 머물렀던 것을 기리기 위한 세워진 박물관이 있다고 합니다. 

[출처] https://www.paulgauguinmartinique.fr/



폴 고갱 (Paul Gauguin)과 빈센트 반고흐(Vincent van Gogh)

 

고갱의 마르티니크 (Martinique) 연작은 '아르센 프와티에'의 갤러리에서 전시되었습니다. 프와티에는 빈센트 반고흐(Vincent van Gogh)로부터 존중받고 있었고, 그의 동생 테오 반 고흐와도 거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테오는 900프랑을 주고 고갱의 작품 세 점을 사서 자신의 사무실에 걸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고갱과 고흐는 친분을 맺게 되었습니다. 

 

테오의 주선으로 아를에 있는 고흐의 '노란 집'을 방문한 고갱은 9주 동안 함께 머물며 작업실을 함께 쓰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떠납니다. 그날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랐습니다. 고갱이 고흐의 '노란 집'을 떠나게 되는 이야기는 고갱의 그림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와 관련이 있습니다. (아래 그림 참조) 그 역사적 스토리와 고흐와 고갱이 함께 작업한 '노란 집' 그림은 앞선 포스팅에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2024.03.14 - [예술가의 공간] -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와 떠돌던 그의 공간들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와 떠돌던 그의 공간들

사실 '화가의 방'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예술가는 빈센트 반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 일 겁니다. 너무나 알려져 있으며 고흐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아를의 침실 (Bedroom in Arles) '이라는 그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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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와 고갱은 다시는 서로 만나지 않았지만, 둘 사이의 연락은 이어졌고, 1890년 고갱은 아를에서 멀지 않은 벨기에 엔트워프(Antwerp)에 화실을 마련하였습니다. 훗날 고흐는 <에텐 정원의 추억(아를의 여인들)>을 그리고서 이 작품이 고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밝혔지만, 고갱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고흐로부터 받은 영향은 아무것도 없다고 부인하였다고 합니다. 

폴 고갱,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고흐, 1888

 

 

 

1889년 가을, 폴 고갱(Paul Gauguin)은 마이어 데 한(Meijer de Haan), 폴 세뤼지에 (Paul Sérusier), 샤를 필리제(Charles Filiger)와 함께 마리 헨리(Marie Henry)가 운영하는 해변 바에 있는 르 폴뒤 (Le Pouldu)에 잠시 머물게 됩니다. 겨울에는 그들이 그 식당의 벽, 천장, 문, 창문을 장식하기도 했다고 해요. 그곳은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고갱하우스 박물관(Gauguin House Museum)

주소 :10 Rue des Grands Sables 29360 Clohars-Carnoët, 프랑스

 

클로하르 카르노에(Clohars-Carnoët)에 있는 고갱하우스 박물관(Gauguin House Museum)은 문 닫은 술집(Buvette de la Plage)을 역사적으로 재건축한 공간이라고 합니다. 

고갱 하우스 박물관 [출처] https://www.quimper-tourisme.bzh/en/patrimoine_culture/maison-musee-gauguin/

 



 

폴 고갱 (Paul Gauguin) 이 머물던 '폴리네시아( Polynesia )의 타히티( Tahiti) 섬'

1890년 고갱은 다음 작품 활동을 타히티(Tahiti)에서 하는 것을 구상했습니다. 그림경매 등으로 필요자금을 모아 1891년 4월, 배를 타고 출발하여 그해 5월 파페에테(Papeete)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일체의 유럽문명이 닿지 않은 이상적 원시로서 타히티를 바라보았으나, 고갱의 기대와는 다르게 타히티의 식민수도 파페에테는 이미 유럽화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생각한 원시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었고, 그는 유럽식 복장을 한 타히티 사람을 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갱은 에드몽 드 보비와 같은 사진가의 연출사진을 빌려 이상화된 원시 자연 속의 여인을 그렸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1901년 출간된 고갱의 편지집 <노아 노아>에 고백되어 있습니다. 아래 그림은 그의 편지집 '노아노아 앨범' 그리고 그의 첫번째 타히티 방문기간에 그린 그의 그림입니다. 

Paul Gauguin, Noa Noa Album [출처] https://www.paul-gauguin.net/
Paul Gauguin. The Meal (The Bananas), 1891

 

 

고갱은 당시 44살이었는데, 13세였던 테하아마나(  Teha'amana )와 결혼했습니다. 고갱은 메테와 헤어졌지만, 정식으로 이혼한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는 13살의 아내를 모델로 한 누드화 <유령이 그녀를 지켜본다>를 그렸고, 1893년 8월,  타히티 생활을 마친 그는 원주민 아내를 아무 죄책감 없이 버리고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림 : 아내 테하아마나의 초상과 유령이 그녀를 지켜본다.)

1. Paul Gauguin, Merahi metua no Tehamana, 1893 / 2. Paul Gauguin, Spirit of the Dead Waching, 1892

 

파리로 돌아온 그는 타히티를 소재로 한 그림들을 그려 전시회에 출품하였고, 1894년 11월 열린 듀랑-루엘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 40여 점 가운데 11점이 팔려 드디어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 시기 아내 메데와 정식 이혼절차를 밟기도 하였습니다.

 

1895년 6월 고갱은 다시 타히티로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는 파페에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땅을 얻고 널찍한 화실을 갖췄습니다. 타히티의 싼 물가 덕분에 그는 말과 수레를 구할 수 있었고, 그가 원하던 식민지 생활을 즐길 수 있었지요.

Paul Gauguin, The Birth - Te tamari no atua, 1896

 

1901년에는 편집장이 되어 <레 게페( Les Guêpes)>라는 신문을 발행했다고 합니다. 원주민에게 불편한 기사를 쏟아내기도 했고요. 원주민 여성을 상대로 성적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고 이로 인해 구속되기도 했습니다. 이웃집의 14살 원주민 파우라와 동거하며 딸을 낳기도 했고요. 몇 해 동안은 단 한 점의 그림도 그리지 않았다고 해요.

폴 고갱, 가우저 박사, 그리고 두명의 타히티인 (Paul Gauguin, Dr. Gouzer and two Tahitians) Photo: courtesy of Daniel Blau, Munich. [출처] https://news.artnet.com/

 

1897년 4월, 그가 아끼던 딸 알린의 사망소식과 은행의 거래 중지로 인한 빚 독촉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의 마지막 대작을 제작합니다.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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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 미술관 ( Musée Paul Gauguin)

[출처] https://www.tahitiheritage.pf/musee-gauguin-papeari/

 

1965년 6월 15일 개관한 고갱 미술관은 파페아리 해리슨 스미스 식물원 한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한 큐레이터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50년 동안 운영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2013년부터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고갱 (Paul Gauguin)의 마지막 장소 '마르키즈 제도( Les îles Marquises )' 

 

고갱은 타히티 섬에서 북동쪽으로 1,200km 떨어져 태평양의 한가운데 있는 마르키즈 제도( Les îles Marquises)야말로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전래의 식기와 무기를 쓰며 살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그곳 또한 타히티와 별반 다를 것 이 없이 유럽화 되었다는 것을 실감하죠. 아래는 그가 1902년 히비오아에서 남긴 그림입니다.

Paul Gauguin, Le Sorcier d'Hiva Oa, 1902

 

그곳에서 고갱은 병세를 얻었지만, 또 원주민의 딸을 건드리고, 14살 소녀였던 원주민 소녀 베이호는 그의 딸을 낳습니다. 고갱은 베이호와 동거하며 요리사와 하인을 두고 생활하였고, 마르키즈의 이웃 소녀들과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고갱의 병세는 계속 악화되었고, 고통을 덜기 위해 모르핀에 손을 대며 중독되었다고 합니다. 베이호는 그의 곁을 떠나 가족으로 돌아갔고, 오랜 병마와 약물 중독에 시달리던 폴 고갱은 1903년 5월 8일 사망하였습니다. 

 



폴 고갱 문화센터 ( Le Centre Culturel Paul Gauguin )

이 공간은 폴 고갱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3년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마르키즈 제도 히바오아(Hiva Oa) 섬 아투오나( Atuona )는 폴 고갱의 생애 마지막 3년 동안의 집이었으며, 그가 사망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폴 고갱 문화센터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Paul_Gauguin_Cultural_Center
마르키즈제도 히바오아 섬의 아투오나 묘지에 있는 폴 고갱의 무덤 [출처] https://www.lemonde.fr/festival/article/2016/08/01/gauguin-un-libertaire-aux-marquises_4976904_4415198.html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작고 순수한 섬에 가서 그들의 원시적이고 토속적이며, 이국적인 요소에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리는 그 시도는 좋습니다. 이미 유럽의 문명이 퍼져 그대로의 묘사가 아닌 연출과 스토리를 통한 신화적 표현을 택한 것 또한 그의 작품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상을 유도하고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가 원주민들에게 행한 행동과 태도는 그의 예술적 위대함을 평가절하하도록 만드는 요소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의 그림에서 타히티 섬과 원주민들을 신화적으로 신비롭게 묘사한 것과는 달리 그의 행보를 살펴보면 그들에 대한 사랑과 존중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혹자는 폴 고갱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무례하고 야망이 넘치며, 자기중심적이고 부도덕하다고요. 어쩌면 전쟁, 그리고 돈과 인종, 신분 등 권력을 통한 지배가 일상인 시대, 지배하는 자로서의 우월감과 자만의 태도로 원시의 섬을 바라본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살아있을 때 크게 인정을 받지 못한 화가인 이유도 있지만, 현대의 명성에 비해 그의 흔적이 남아 운영되는 지금의 공간은 초라하기만 합니다. 그의 공간을 더욱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싶지만, 그의 그림을 통해서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가 태어나고 머물던 지역에서 그의 공간을 철저한 고증을 통해 복구, 재현하지 않은 것은 살아생전 그의 불명예스러운 행동에서 비롯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편으로는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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