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공간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와 가브리엘 뮌터( Gabriele Münter)가 살던 예술가의 집 '뮌터하우스(Münter House)'

magicalelf 2024. 3. 20.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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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화가이자 연인이었던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 Wassily Wassilyevich Kandinsky) 1866~1944와 가브리엘 뮌터( Gabriele Münter) 1877~1962의 공간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그들의 만남과 작품, 그들이 동거하며 예술과 삶을 나누던 공간을 다룰 예정이기에, 그들을 탐구하는 여정은 영화를 보는 느낌과도 같습니다. 우선 '바실리 칸딘스키'와 '가브리엘레 뮌터'가 만나기 전 그들의 인생을 조금 먼저 탐구해 보겠습니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 Wassily Wassilyevich Kandinsky) 1866~1944 

그는 러시아 모스크바 출신의 화가로 추상 회화의 창시자라 불립니다. 초기에는 유겐트슈틸, 인상주의와 러시아 민예의 영향이 있었고, 점차 그림에 표현주의적 경향이 짙어지면서 신예술과 협회를 설립했다고 합니다. 그의 추상회화는 드라마틱한 시대, 컴포지션 시대, 원의 시대, 구체 예술의 시대로 나누기도 합니다. 

 

그는 1866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났습니다. 1886년 모스크바 대학교에 들어가 법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성공적인 법학자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 그는 189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그림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클로드 모네의 그림과 인생, 그의 공간은 앞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2024.03.01 - [예술가의 공간] -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의 집과 정원에 대하여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 의 집과 정원에 대하여

꽃과 정원, 건축과 인테리어, 그림과 조형예술...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일하고 공부하는 분야입니다. 그런 저에게 '공간탐닉여행' 블로그를 운영하는 일은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수많은 생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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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인 1896년 칸딘스키는 독일로 건너가 아즈베 미술학교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했는데, 1900년에 뮌헨아카데미에서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에게 사사하며 훗날 바우하우스에서 함께 일하게 되는 동료 화가 파울 클레(Paul Klee)를 만나게 됩니다.

 

칸딘스키는 1901년 팔랑크스 전시협회 및 미술학교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가브리엘레 뮌터(Gabriele Münter)를 만나 이후 몇 년 동안 그녀와 수많은 도시를 여행하며 함께 작품 활동을 하게 됩니다.

 

가브리엘 뮌터( Gabriele Münter) 1877~1962

 

그녀는 1877년 2월 19일 독일 베를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1897년 뒤셀도르프에서 그림 개인교습을 받았으며 1901년 뮌헨 여성화가협회의 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고 합니다. 같은 해 겨울 팔랑스 미술학교(Phalanx School)로 옮기게 되는데 그곳에서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를 만났습니다. 칸딘스키는 팔랑스 미술학교의 설립자이며 그곳에서 미술을 가르쳤습니다.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에서 연인이 되었습니다. 1903년부터 1914년까지 그들의 연인관계는 지속되는데 이 시기 그녀는 가장 활발한 예술 활동을 펼쳤다고 합니다. 1909년 뮌터는 독일 바이에른 지방 무르나우에 집을 얻어 칸딘스키와 동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집은 뮌헨 아방가르드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는데, 야블렌스키(Alexei von Jawlensky)와 그의 부인 베레프킨(Marianne von Werefkin)이 이곳에서 작업했고 마르크(Franz Marc), 마케(August Macke), 클레(Paul Klee), 쿠빈(Alfred Kubin) 등이 정기적인 모임을 갖기 위해 이곳을 드나들었습니다.

무르나우의 '뮌터하우스' Murnau의 Munter House [출처] https://www.muenter-stiftung.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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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칸딘스키 가브리엘 뮌터의 '뮌터하우스( Münter House, gabriele münter haus)'

주소 : Kottmüllerallee 6, 82418 Murnau am Staffelsee, 독일


무르나우의 '뮌터하우스( Münter House)'는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예술가의 희망에 따라 뮌터 하우스 전체는 1998~99년에 개조되어 대중에게 공개된 이후 그녀의 예술과 칸딘스키를 기억하는 장소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1909년부터 1914년까지 원래의 상태로 복원하는 작업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칸딘스키와 뮌터의 그림, 그래픽, 반전 유리그림 등 풍부한 가구와 그들이 수집한 민속 예술품, 직접 그린 가구 덕분에 오늘날 이 집은 당시의 분위기를 다시 한번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뮌터( Gabriele Münter)는 1909년 8월 21일 무르나우(Murnau)의 코트뮐러 골목(Kottmüllerallee)에 있는 집을 구입했습니다. 그때부터 1914년까지 가브리엘레 뮌터와 바실리 칸딘스키가 자주 머물렀던 이 집은 '러시안 하우스'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함께 정원을 꾸미고, 자신들의 디자인에 따라 가구를 칠했다고 합니다. 특히  칸딘스키는 정원을 헌신적으로 디자인하고 가꾸는데 공을 들였다고 합니다.

무르나우의 '뮌터하우스' Murnau의 Munter House [출처] https://www.muenter-stiftung.de/

 

 

1908년 무르나우로 거처를 옮긴 칸딘스키는 그곳에서 일련의 풍경화를 제작했습니다. 초기에 그는 화려한 색채의 풍경화나 러시아 민속화에서 영감을 얻은 주제들을 그렸으나, 점차 구상적인 묘사에서 벗어나 대상과 상관없이 형태와 색채, 선들 속에서 표현 가능성의 확장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음악과 철학, 근대미술과 추상작업에 대한 사상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1909년 그는 캔버스를 매우 자유로운 필치의 점과 색띠로 뒤덮음으로써 추상을 탐험했습니다.

 

무르나우의 풍경, 특히 집 자체, 정원, 주변 환경은 뮌터와 칸딘스키에게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종종 교회 창밖의 풍경과 성, 산맥을 그렸습니다.  뮌터의 작품은 그녀 삶의 모든 풍경을 품고 있습니다. 그녀 자신과 칸딘스키, 무르나우 집의 친구들, 마을의 거리와 농가, 슈타펠 호수, 바이에른의 산악 풍경, 과일과 꽃, 도자기와 민속품이 있는 정물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에 내면의 정서를 담아 형상화하는 작업을 보여주었습니다. 맑고 상징적인 색채와 대담하고 단순한 형태, 뚜렷한 검은 윤곽선은 그녀 작품의 표현성을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Gabriele  Munter "Russisches Haus" in Murnau, 1931
Gabriele Munter , Kandinsky and Erma Bossi, 1910
Gabriele Munter , Gabriele Munter House Interieur, 1910

 

Münter House는 "블루라이더(Blauer Reiter)" 그룹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아방가르드의 중요한 만남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인근 진델스도르프에 살았던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알렉세이 폰 야블렌스키(Alexej von Jawlensky), 마리안느 폰 베레프킨(Marianne von Werefkin),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 아르놀트 쇤베르그(Arnold Schönberg)가 자주 방문했고, 수집가와 갤러리 소유자도 방문했습니다. 

 

가브리엘 뮌터( Gabriele Münter)는 1909년 뮌헨 신미술가협회(NKVM)를 결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술적인 견해 차이로 뮌터는 칸딘스키, 마르크와 그곳을 탈퇴하였죠. 그리고 그들은 1911년 뮌헨에서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와 함께 아방가르드 모임인 ‘청기사파’를 결성하였습니다. 1911년 10월, 연감 "Der Blaue Reiter"를 준비하기 위한 작업 세션도 이곳 뮌터하우스에서 열렸습니다. Münter와 Kandinsky 외에도 Franz와 Maria Marc, August와 Elisabeth Macke가 참여했습니다. 그렇게 2년 동안 이 그룹은 독일 표현주의 미술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청기사파는 자연 해산되고 러시아인인 칸딘스키는 독일을 떠나야 했습니다.  1914년 8월 1일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뮌터와 칸딘스키는 처음에 스위스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칸딘스키는 러시아인으로서 적군 진영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14년 11월 그는 모스크바로 돌아와 1921년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모스크바에서 그는 민족 계몽을 위한 위원회의 회화분과에서 활동하는 한편, 모스크바 아트워크숍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구성주의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가브리엘레 뮌터(Gabriele Münter)는 1915년 여름부터 1917년 12월까지 스웨덴에서 거주한 후 코펜하겐에 정착했습니다. 결혼까지 약속했지만 칸딘스키는 끝내 약속을 저버리고 1917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장군의 딸과 결혼하였습니다. 뮌터는 깊은 상처로 무르나우의 작은 집에 혼자 기거하며 고독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1920년 초에 뮌터는 독일로 돌아왔습니다. 1931년부터 그녀가 죽을 때까지 무르나우의 집에서 살았는데,  1936년부터는 그녀의 파트너인 미술사가 요하네스 아이히너(Johannes Eichner, 1886-1958)가 함께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1949년 뮌헨의 ‘청기사’ 전시회에서 그 위상을 보여주었습니다. 무르나우에 남겨진 칸딘스키의 초기 작품들을 나치 통치 기간 동안 지켜낸 뮌터는 그 작품들과 자신의 그림을 뮌헨 렌바흐하우스 (Lenbachhaus) 시립미술관 (Städtische Galerie)에 기증하였습니다.  그녀는 1962년 85살의 나이로 무르나우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1922년 칸딘스키는 바우하우스에서 회화와 미술이론을 강의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독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는 1933년 나치들의 탄압으로 바우하우스가 강제로 폐쇄하자 파리로 망명을 떠났고 그곳에서 남은 생을 보냈습니다. 1937년 나치스가 퇴폐예술가라고 지적하여 작품이 몰수당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1944년 프랑스 뇌이쉬르센에서 78년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아름다운 그림과 풍경으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러시아 사람의 집 - 뮌터하우스( Münter House)'는 가슴 아픈 공간이기도 합니다. 칸딘스키와 뮌터가 '사실혼'관계로 살던 이 집은 그 당시 동네사람들에게 '창녀집'이라는 악의적인 명칭으로 통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당시 그들의 그림 또한 '정체불명의 엉터리 그림들'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고요. 너무 많은 추억과 너무 많은 환멸이 서린집이기에 오랜 세월 뮌터는 그 집을 멀리하기도 했고, 그녀의 연인은 그곳에 남아 하염없이 기다렸다고 합니다. 반면, 칸딘스키는 여러 해에 걸쳐 의도적으로 그녀를 외면했고, 결국 얼마 후에 다른 사람과 결혼했지요. 

 

칸딘스키의 그림이 추상적이기는 하나, 풍경화를 많이 그리던 시기에도 뮌터의 그림 (칸딘스키를 그린 그림과 뮌터하우스를 그린 그림들)에 담겨있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공간에 대한 애정과 사랑을 그의 그림에서는 찾을 수 없기에, 그 시기, 그들의 사랑은 수평을 이루지 못하였나 보다... 짐작이 되기도 합니다.

 

'전쟁'이라는 시대적 아픔과 '사랑'이라는 그들의 개인적 고통이 묻어있는 공간이지만, 막 사랑을 하기 시작해 일상을 공유할 집을 얻고 함께 가꾸고... 하던 시기의 흔적이 남아 현대의 우리는 따뜻한 감동을 느끼는 아이러니가 있는 '예술가의 집' - 러시아 사람의 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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