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Netherlands) 근대미술의 화가이자 추상화의 초기화가에 속하는 <네덜란드 구성주의 회화의 거장> '몬드리안'의 공간을 엿보려 합니다. 사실 저는 구상적인 예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닙니다. 하지만, 건축과 패션... 예술과 디자인에 걸친 다양한 분야에서 그의 작품은 좋은 영감이 되고 있습니다. 패션디자이너인 이브 생 로랑( Yves Saint Laurent )은 그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아 '몬드리안 룩(Mondrian look)을 선보이기도 했으며, 현재까지도 매년 나오는 다양하고 새로운 컬렉션들에 그의 그림은 모티브로서 꾸준히 등장하고 있기에,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화가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작품세계의 과정과 그의 정체성이 투영된 공간 또한 궁금해집니다. 일찍이 탐험을 시작해 볼게요.
그는 뉴 디자인(New Design)과 스틸(De Stijl) 예술운동의 주요한 인물 중 하나로, 그의 그림들은 가로와 세로의 검은 선의 격자(grid)와 삼원색을 사용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의 작품은 처음에는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나무, 강 등의 풍경을 그렸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추상화되었다고 합니다.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
그의 본명은 피트 코르넬리스 (피에트) 몬드리안 (Pieter Cornelis (Piet) Mondriaan) 1872~1944으로 네덜란드의 아메르스포르트(Amersfoort)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892년 교사 자격증을 딴 뒤 같은 해에 암스테르담(Amsterdam)의 미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때 당시만 해도 빈센트 반 고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림을 주로 그렸다고 합니다. 빈센트 반고흐와 그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는 앞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참고 바랍니다.
2024.03.14 - [예술가의 공간] -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와 떠돌던 그의 공간들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와 떠돌던 그의 공간들
사실 '화가의 방'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예술가는 빈센트 반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 일 겁니다. 너무나 알려져 있으며 고흐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아를의 침실 (Bedroom in Arles) '이라는 그림이
spacetrek.tistory.com
몬드리안 생가_ 몬드리안 하우스 The Mondriaan House(Mondriaanhuis)
주소: Kortegracht 11, 3811 KG Amersfoort, 네덜란드
몬드리안 하우스는 네덜란드 아메르포르트(Amersfoort)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그가 태어난 집이기도 합니다. 박물관은 아메르스포르트의 역사적 중심지에 위치하며, 박물관 건물은 몬드리안의 아버지가 교장으로 재직했던 기독교 초등학교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1994년 건축가 네오하이덴리크(Leo Heidenrijk)와 그의 아내 시스(Cis)가 이 장소를 박물관으로 만들어 대중에게 공개하고, 집과 학교는 문화센터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곳은 몬드리안의 상징적인 작품, 작품세계의 형성과정, 관심사, 친구들 등에 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몬드리안에 관한 여러 시청각자료를 전시하고 있습니다. 아메르스포르트(Amersfoort), 빈테르스베잌(Winterswijk), 암스테르담(Amsterdam ), 파리(Paris), 런던(London), 그리고 뉴욕(NewYork)까지... 그의 발자취를 따라 작품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몬드리안의 아틀리에 _암스테르담(Amsterdam)
주소: Rembrandtplein 10 in Amsterdam
그가 1년 동안 살던 암스테르담의 작업실 풍경이 흑백사진으로 남아있습니다.
주소: Sarphatipark 42
몬드리안은 1908~1911 사이 암스테르담 사프티파크 42번지에 위치한 예술가를 위한 건물에 머물며 작업하기도 했습니다. 그곳의 풍경 또한 사진으로 남아 우리에게 영감을 전해줍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하나의 주제로 계속해서 다양한 측면을 관찰하고 비전을 발전시키면서 주제에 대한 변형을 만들어냅니다. 추상화를 그리는 몬드리안은 관찰화가로 출발했으며, 위의 세 작품은 실험 궤적뿐 아니라 단일 주제에서 얻을 수 있는 영감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줍니다. 첫 번째 작품인 사과, 둥근 냄비, 탁자 위의 접시는 몬드리안이 네덜란드에 거주하면서 그곳의 현실주의 전통에 따라 풍경과 정물화를 그리면서 아르누보 감성을 갖고 있던 시절로 거슬로 올라갑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작품은 파리로 이주하여 모더니스트 아방가르드와 운명을 같이한 지 불과 1년 만에 완성된 그림이라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두 개의 생강항아리 조각에서 볼 수 있듯이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와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던 중 1911년 입체파의 그림을 접하면서 그의 작품이 크게 변화합니다. 현대미술을 더 가까이 접하기 위해 그해 파리로 건너가 입체파를 연구하기 시작하고 풍경을 점차 추상화하여 그리기 시작합니다.
1914년, 잠시 귀국한 사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네덜란드에 고립된 몬드리안은 이 즈음부터 수직, 평면만으로 그림을 구성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그려진 작품이 우리가 생각하는 몬드리안 스타일의 그림인데, 이렇게 자신의 작품을 정립한 게 그의 나이 무려 42세였다고 합니다.
1914년에는 네덜란드에서 다른 현대 화가들과 함께 더 스틸(De Stijl) 양식이라는 그룹을 형성하고, 같은 이름의 잡지를 창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이 모임에서 자신의 작품을 '신 조형주의'라고 규정하고 잡지에 자신의 이론에 대해 게재하였습니다. 그는 이 글에서 수직선, 수평선, 원색, 무채색만으로 표현되는 자신의 작품은 진리, 근원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고, 이를 위해 그림을 기하학적으로 단순화하였다고 주장합니다.
1919년 전쟁이 끝난 후 몬드리안은 다시 프랑스 파리로 향합니다. 파리에서 생계유지를 위해 가벼운 수채화를 그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계속 추상화 탐구를 지속하던 몬드리안은 이 시기 더 스틸 그룹과 멀어지는 일이 생깁니다. 갈등의 요인은 다름 아닌 그림에 대각선을 넣느냐 마느냐는 문제였지요. 이후 그는 더 스틸 대신 바우하우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자신의 아틀리에를 자신의 작품 스타일에 맞추어 개조합니다.
파리에서 그의 생활은 그의 작품 세계만큼이나 엄격했습니다. 개조한 아틀리에만 해도 삼원색과 무채색의 직사각형 보드만으로 꾸미고 색의 통일을 위해 장식용 꽃까지 흰색으로 칠해놨었다고 합니다. 또한 손님의 식사대접마저도 콩, 감자요리 등 간단하고 소박하게 차렸다고 해요.
몬드리안의 아틀리에 _파리(Paris)
주소: 26 Rue du Départ, Paris
그의 아틀리에는 현재 사진으로만 남아있습니다. 다행히 사진가 폴 델보(Paul Delbo)가 그의 아틀리에를 사진으로 담아주었고, 프랑수아 레비-쿠엔츠(François Levy-Kuentz)의 다큐멘터리 영화 <몬드리안의 작업실 (L'atelier de Mondrian) 2010> 촬영을 위해 사진에 담긴 모습 그대로 그의 작업실을 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1928년, 그의 나이 56세에 지인의 딸 리리를 만나 우연히 교제를 시작합니다. 이때 그의 작업실에 유일하게 자연색 꽃 화분을 장식해 놓을 정도로 둘의 사랑은 깊었다고 해요. 그런데, 그때 리리의 나이가 고작 20살이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그녀의 아버지는 심하게 반대하였고, 아버지의 강요로 그녀는 네덜란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둘의 사랑은 좌절되었지요.
60대에 이르러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던 몬드리안의 작품은 재평가를 받기 시작합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그의 작품이 인기가 높아졌고, 그의 그림을 모티브로 한 옷이 선보여지기도 했지요. 이브 생 로랑( Yves Saint Laurent )은 자신이 사랑했던 예술가들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의상을 통해 존경심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1965년 가을~겨울 컬렉션에 몬드리안의 그림을 직물로 표현하고, 그의 기하학 감각을 디자인으로 전달했습니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몬드리안은 프랑스 파리에서 영국 런던으로, 다시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뉴욕의 역동적인 분위기, 당시 유행하던 비밥 재즈에 심취한 몬드리안은 뉴욕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기존의 검은 수직선, 수평선에서 원색의 선으로 캔버스를 채우게 됩니다. 그렇게 미국으로 망명하여 귀화한 것이 1940년입니다.
몬드리안의 아틀리에 _뉴욕(New York)
주소: East 59th Street in New York.
몬드리안은 1943년 10월부터 1944년 사망할 때까지 단 4개월 동안 이스트 59번가 15번지에 위치한 스튜디오에서 지냈습니다. 그는 이곳을 벽에 매달린 색색의 판지조각을 사용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배열로 디자인했습니다.
몬드리안의 유명한 그림 < Victory Boogie Woogie >는 그가 1944년 2월 1일 사망했을 때 당시 미완성의 상태로 이젤 위에 놓여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1942년 6월부터 이 그림을 작업해 왔으며, 죽기 3일 전에도 여전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비록 미완성이었지만 즉흥적 부기우기 음악의 리듬과 활기찬 대도시의 에너지, 즉 이곳의 삶 자체를 시각화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음을 보여준다고 이야기됩니다. 그가 수십 년 동안 노력해 온 역동성과 조화가 융합을 이루는 마지막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1944년 뉴욕에서 폐렴으로 사망했습니다.
'예술가의 공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끊임없이 변화하는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 Pablo Ruiz Picasso)의 작품과 공간 _ 스페인과 프랑스 곳곳의 흔적들 (4) | 2024.03.24 |
---|---|
천재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의 초현실주의적 공간 (0) | 2024.03.22 |
폴 고갱(Paul Gauguin)이 머물던 공간들 프랑스, 폴리네시아, 타히티 (0) | 2024.03.21 |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와 가브리엘 뮌터( Gabriele Münter)가 살던 예술가의 집 '뮌터하우스(Münter House)' (0) | 2024.03.20 |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와 떠돌던 그의 공간들 (11) | 2024.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