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공간

끊임없이 변화하는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 Pablo Ruiz Picasso)의 작품과 공간 _ 스페인과 프랑스 곳곳의 흔적들

magicalelf 2024. 3. 24. 0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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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프랑스의 탈 인상주의 화가인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과 네덜란드 구성화가의 거장 (피에트) 몬드리안 (Pieter Cornelis (Piet) Mondriaan) 1872~1944 , 그리고 스페인 초현실주의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omingo Felipe Jacinto Dalí i Domènech) 1904~1989의 작품과 그들의 공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화풍과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예술가지만,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프랑스 파리에서 전시와 작품활동을 했다는 것과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입니다. 

 

앞 서 다룬 위 화가들에 관한 이야기는 아래 링크를 참조 바랍니다.

2024.03.21 - [예술가의 공간] - 폴 고갱(Paul Gauguin)이 머물던 공간들 프랑스, 폴리네시아, 타히티

 

폴 고갱(Paul Gauguin)이 머물던 공간들 프랑스, 폴리네시아, 타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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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1 - [예술가의 공간] -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그의 구성주의 그림과 공간_ [네덜란드]에서 [파리]를 거쳐 [뉴욕]까지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그의 구성주의 그림과 공간_ [네덜란드]에서 [파리]를 거쳐 [뉴욕]까

네덜란드(Netherlands) 근대미술의 화가이자 추상화의 초기화가에 속하는 '몬드리안'의 공간을 엿보려 합니다. 사실 저는 구상적인 예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닙니다. 하지만, 건축과 패션... 예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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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2 - [예술가의 공간] - 천재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의 초현실주의적 공간

 

천재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í)의 초현실주의적 공간

유쾌한 콧수염이 떠오르는 스페인의 천재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과 그의 공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회화와 그래픽 아트, 영화, 조각, 디자인, 사진 등 시각예술뿐 아니라 소설, 시, 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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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드리안과 살바도르 달리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피카소는 20세기의 대표점 큐비즘 작가로서 여러 예술가들의 발전에 영향을 준 위대한 화가입니다. 이에 피카소의 인생과 그의 작업실을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파블로 피카소( Pablo Ruiz Picasso) 1881~1973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 Pablo Ruiz Picasso), 그의 풀네임은 매우 길죠.  '파블로 디에고 호세 프란시스코 데폴라 후안 네포무세노 마리아 데로스레메디오스 시프리아노 데라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루이스 이피카소' (Pablo Diego José Francisco de Paula Juan Nepomuceno María de los Remedios Cipriano de la Santísima Trinidad Ruiz y Picasso)입니다. 그는 스페인 출신으로 주로 프랑스에서 미술활동을 한 예술가입니다. 그는 다작과 창작물의 다양성으로도 유명한데, 1만 3,500여 점의 그림과 700여 점의 조각품을 창작했으며, 모든 작품을 합치면 3만여 점 이 된다고 합니다.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 Pablo Ruiz Picasso)는 1881년 에스파냐 (España)의 항구도시인 '말라가(Malaga)'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아버지는 화가로 공립 미술학교 교사이자 식당장식을 하는 화가였다고 합니다. 어렸을 적부터 그림을 접하며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고, 아버지를 놀라게 했다고 해요. 그가 14세가 되던 해 가족은 바르셀로나(Barcelona)로 이사했고, 피카소는 아버지가 일하는 미술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그 시기에 그는 미술전에서 상을 받는 등 역량을 인정받았습니다. 남들이 1개월 정도 준비하는 과제를 며칠 만에 완성하고 1등을 차지하는 등의 일화도 있으며 이미 15살쯤 그는 이미 대가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듬해 그는 마드리드에 위치한 산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학교 수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매일 프라도 미술관의 명화를 감상하고 다녔다고 해요.

 

결국 1901년 당시 파리 몽마르르( Montmartre )의 술집을 근거지로 하여 기지와 풍자를 무기로 삼고 세기말의 풍속을 그리고 있던 화가 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와 스텐렌의 작품에 이끌려 파리의 땅을 밟게 됩니다. 하지만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고 기대했던 그의 아버지는 평생 동안 그의 화풍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와 반목하다가 1913년에 작고했다고 합니다. 


스페인(Spain) 항구도시 '말라가(Malaga)'에 남아있는 피카소의 흔적들  

1. 피카소 생가 박물관 (Museo Casa Natal de Picasso)

주소: Pl. de la Merced, 15, Distrito Centro, 29012 Málaga, 스페인

 

이곳은 피카소가 태어나 인생의 첫 10년을 보낸 곳으로 바르셀로나로 이사하기 전까지 살던 집입니다. 이후 1895~1901년 사이에도 종종 여름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이 저택은 8개의 객실로 구분하여 그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피카소 생가 박물관 (Museo Casa Natal de Picasso) [출처] https://museocasanatalpicasso.malaga.eu/

 

 

객실 1, 2, 3은 피카소가 예술교육을 받던 시기의 작품들을 전시합니다. 

객실 4, 5, 6은 말라가에서 피카소가 살았던 시절의 모습을 연상하게 만드는 가족 초상화 등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의 가족이 소유하던 유화컬랙션과 더불어 그 시기의 소품 등 그들의 삶을 상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6번 방에는 피카소가 어린 시절에 입었던 의복과 가지고 놀던 물건들과 사진들 또한 보존되어 있습니다. 

 객실 7은 피카소 아버지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의 그림 주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비둘기'라고 합니다.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에 관한 피카소의 판화와 평화주의 회의에 참석하는 모습이 담긴 다큐멘터리 영화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객실 8은 지중해와 말라가 항구를 그린 그림을 비롯하여 그리스 신화의 바다, 고대 지중해를 연상시키는 피카소의 작품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중해'가 피카소의 작품에 미친 영향과 더불어 가족, 친구들과 해변을 즐겼던 사진 또한 전시되어 있습니다.

객실 9는 피카소의 '투우'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1973년 4월 8일 피카소가 사망하자 그의 시신은 스페인 망토로 감싸졌다고 합니다. 한때 피카소는 그 망토를 입고 황소를 보러 갔다고 해요. 그 복제품 또한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피카소 생가 박물관 (Museo Casa Natal de Picasso) [출처] https://museocasanatalpicasso.malaga.eu/
피카소의 어린시절 가족사진 [출처] https://museocasanatalpicasso.malaga.eu/


2. 말라가 피카소 뮤지엄 (Museo Picasso Malaga)

주소: Palacio de Buenavista  Calle San Agustín, 8  29015 Málaga  Spain.

말라가 피카소 뮤지엄 (Museo Picasso Malaga) [출처] https://www.museopicassomalaga.org/

 

 

피카소 뮤지엄은 1953년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와 후안 템부리 알바레스(Juan Tembory Álvarez), 그리고 당시 말라가 지방 미술 대표단에 의해 처음 기획되었습니다. 피카소는 자신의 작품을 자신이 태어난 도시인 '말라가'에 두기 원했지만, 그 계획은 곧 무산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그의 첫 번째 며느리가  말라가 지방자치단체와 접촉했고, 말라가 사람들의 열광에 힘입어 1996년 계획을 재개하게 됩니다. 

1997년에는 안달루시아 지방정부가 이곳을 구입했고, 피카소의 손자는 233점의 작품을 미술관에 기증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라가 레가도 피카소 재단 박물관(Paul, Christine y Bernard Ruiz-Picasso)이 설립되었고, 2003년 재단설립 50주년이 되는 해 개관되었습니다. 뮤지엄은 부에나비스타 궁전(Buenavista Palace)과 건물 뒤에 있는 15채의 주택을 구입하여 개축되었습니다.  기부된 피카소의 영구 작품 컬렉션을 중심으로 기획전시를 통해 작품이 일시적으로 추가되어 운영된다고 합니다. 

 

말라가 피카소 뮤지엄 (Museo Picasso Malaga) [출처] https://www.museopicassomalaga.org/
부에나비스타 궁전(Buenavista Palace) [출처] https://www.museopicassomalaga.org/


 1901년부터 4년 동안 피카소는 파리와 아버지가 계신 바르셀로나를 왕래하면서 사회의 패잔자, 뒷거리의 영락한 사람들, 노인, 고독자 등의 인간 상을 화면에 포착하였습니다. 기지와 풍자를 쓰지 않고 충분한 공감의 시선을 통한 그림이었습니다. 그림의 대상은 짙은 파랑의 거의 한 가지 색으로 표현되며, 이 시기의 작품들은 <청색의 시대(Periodo Azul)>라 표현됩니다.

Pablo Picasso, The Blue Room ( La chambre bleue), 1901

 

 

청색의 시대를 이어  <장밋빛 시대(Rose Period)>가 시작됩니다. 1904~1906에 걸친 비교적 짧은 이 시기는 피카소가 정신적 여유를 찾고 따스한 붉은빛을 많이 사용했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고 해요. 그는 서커스에도 흥미가 있어 유랑하며 연기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제작하기도 하였습니다. 

1. Pablo Picasso, Acrobate et jeune Arlequin (Acrobat and Young Harlequin), 1905 / 2.Pablo Picasso, Maternite( Mother and Child ),1905

 

 

당시 예술가의 후원가로 알려진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남매가 있었는데, 그들은 피카소의 그림을 구입해주기도 했고, 앙리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와의 만남을 주선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아파트  27 rue de Fleurus에서 모임을 가지며 가까워졌다고 해요. 피카소와 마티스는 서로 경쟁하는 태도로 대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친구이기도 하고, 서로를 고양시키는 라이벌 관계로서, 스타일이 극명하게 다른 서로에게 자신의 없는 부분을 보게 되는 긍정적 관계였다고 해요. 실제로 피카소가 12살 많은 마티스의 화실에 종종 놀러 갔는데, 그가 마티스의 작품 일부를 차용해서 쓰는 바람에 마티스가 "저 인간 또 아이디어 훔치러 왔다."면서 투덜거리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앙리마티스의 작품과 그의 공간에 대해서도 앞서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아래 페이지를 참고 바랍니다.

2024.03.06 - [예술가의 공간] -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가 머물던 '프랑스 니스(Nice)' 그리고 그의 공간을 담은 그림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가 머물던 '프랑스 니스(Nice)' 그리고 그의 공간을 담은 그림

최근의 이야기들이 프랑스에 빠져있죠. 이번에는 프랑스의 색채화가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얼마 전부터 국내에서 앙리마티스의 그림이 꽤 인기를 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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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rue de Fleurus _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의 살롱

27 rue de Fleurus는 1903년부터 1938년까지 미국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 Gertrude Stein)과 파트너, 그리고 그녀의 형제가 머물던 집이었습니다. 이곳은 아방가르드 예술가와 작가, 특히 파블로 피카소와 어니스트 허밍웨이가 모이는 유명한 토요일 저녁장소였다고 합니다. 

27 rue de Fleurus [출처] https://www.semanticscholar.org/paper/


 

피카소는 꾸준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다녔고, 어느 전시회에서 아프리카 토속 조각상을 보자 인상적인 생동감과 표현력을 느끼고 이를 자신의 그림에 담아내려고도 했습니다.  그 시기는 <아프리카에 영향을 받은 시대(the African-influenced Period) 1908-1909>라 불려지기도 합니다.

Pablo Picasso,Les Demoiselles d'Avignon , 1907

 

 

<큐비즘(Cubism) 1909-1912 피카소의 입체파>그림은 새로운 개념과 장르를 개척했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고 이야기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물론이고 동료와 친구들조차 피카소의 새로운 도전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마티스는 물론 절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조차 이해할 수 없어 했습니다. 다행히 다니엘-앙리 칸바일러(Daniel-Henry Kahnweiler)와 같은 독일계 화상들이 호평한 덕분에 그림이 완전히 묻히지는 않았으며, 칸바일러는 이 일을 계기로 피카소의 친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피카소는 큐비즘에 빠져있던 시기에도 때로는 이전의 기법으로 표현하기도 했으며, 이 경향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더욱 확실해집니다. 1917년 공동작업으로 인해 로마에 방문했다가 다시 파리로 돌아온 피카소는 나폴리, 폼페이, 피렌체 등을 다니며 고대와 르네상스의 미술에 빠져 1920년 드디어 신고전주의의 화풍을 택하게 됩니다. 이후 3년간을 피카소의 <신 고전파 시대>라 부릅니다.

Pablo Picasso, The Source (La Source), 1921

 

 

1924년에는 다시 화면 구성을 주로 하는 대 정물 시리즈에 착수하는가 하면 다음 1925년에는 환상적이고 기괴한 표현으로 등장한 쉬르레알리즘 운동에 관여합니다. 1930년에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 Ovidius)의 <변신보>와 발자크(Balzac)의 <알려지지 않은 걸작>에 동판화에 의한 삽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Pablo Picasso,Honore de Balzac, Le Chef D'Oeuvre Inconnu, Ambroise Vollard, 1931

 

 

1934년 피카소는 장기간 스페인에 머물렀습니다. 그 해에 많은 투우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1937년 독일 공군이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를 폭격하자 그는 붓을 들어 이에 항의하는 대작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 그림은 그해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의 에스파냐관을 장식하며 화제가 됩니다. 

Pablo Picasso,Guernica, 1937

 

 

피카소는 그 후 이런 식의 행보로 당시 스페인의 독재자였던 프란시스코 프랑코( Francisco Franco)의 미움을 사 미국으로 망명을 갔고, 이후 전쟁이 끝나자 남유럽으로 돌아왔습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피카소는 남프랑스에 있으면서 주로 석판화와 도기의 제작에 열중하였습니다. 당시 그 모든 것이 새로 도전한 분야였으나, 그는 발견화 학습, 연구와 창조를 통해 그 영역에서도 커다란 성과를 올립니다. 1950년대부터는 존경하는 예술가인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 마네(Édouard Mane), 다비드(Jacques-Louis David)등의 명작을 자기 스타일 대로 해석한 모작을 통해 새로운 영역을 탐구하였습니다. 

원작 Eugene Delacroix , The Women of Algiers in their Apartment, 1834 와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피카소의 작품 Picasso,Les Femmes d'Alger, 1955

 

 

또한 1951년에는 우리나라 6·25 전쟁을 모티브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또는 신천 양민 학살을 주제로 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이는 <게르니카>와 함께 그의 대표적인 전쟁을 비판적으로 표현한 작품 중 하나로 당시 '미군을 학살자로 묘사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바람에 한국에서는 1980년대까지 금지예술품이기도 했습니다. 

Pablo Picasso, 한국에서의 학살( Masacre en Corea),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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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아뜰리에(Atelier)  

끊임없이 샘솟는 피카소의 창조적인 천재성은 부단한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그는 예술의 양식, 재료와 기법의 변화뿐 아니라 영감의 원천이 되는 친구들이며 연인들의 만남, 그리고 거처까지도 계속 바뀌었습니다. 

 

1. 파리 몽마르트르의 아파트 _ 바토 라보아르(le bateau lavoir)

당시 피카소는 몽마르트르의 아파트 '바토 라보아르(le bateau lavoir)'에 거처를 정하고 친구도 사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 첫 번째 연인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도 만납니다.

피카소가 머물던 아파트 바토 라보아르(Le Bateau-Lavoir)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Bateau-Lavoir

 

2. 1929년 그의 작업실

1929년 찍었다고 기록된 피카소와 그의 작업실 사진이 남아있습니다. 

Pablo Picasso in his studio. Paris, 1929 [출처] https://travelbyart.com/pablo-picasso-life-and-work/

 


3. 그랑 오귀스탱 가(GRANDS AUGUSTINS) 스튜디오

주소: 7 RUE GRANDS AUGUSTINS, PARIS

 

피카소는 이후 '그랑 오귀스탱 가 (Rue des Grands-Augustins) '에 있는 스튜디오를 얻습니다. 이 스튜디오는 게르니카 창작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피카소는 대부분의 시간을 프랑스 남부에서 보냈고, 파리에 머무는 동안에만 이 스튜디오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건물은 화가 프렌호퍼( Maître Frenhofer)를 배출한 건물이자 작업실이기도 합니다. 

 
그랑 오귀스탱 (Rue des Grands-Augustins)의 피카소 스튜디오 [출처] https://www.flickr.com/

4. 앙티브(Antibes)

그 후 코트다쥐르(Côte d’Azur) 바닷가 바로 앞의 아름다운 마을 앙티브(Antibes)로 거처를 옮겼다고 합니다. 그는 1954년 9월부터 1955년 3월까지 이곳에 머무르며 작업했습니다. 

Picasso with Francoise Gilot, Antibes studio1946 [출처] https://gerryco23.wordpress.com/2013/10/11/picasso-in-antibes-the-joy-of-life/

 


[앙티브(Antibes)의 피카소 미술관]

주소place mariejol, 06600 Antibes, 프랑스

 

이곳 앙티브(Antibes)에는 피카소 미술관이 있습니다. 이곳은 그가 1946년 9월 중순부터 벽면전체를 덮는 Les Clés d'Antibes(The Keys of Antibes)를 포함하여 많은 작품, 스케치 및 그림을 제작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가 파리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을 때 23점의 그림과 44점의 스케치를 성에 보관했습니다. 이후 작품의 기부, 구매를 통해 피카소의 여러 작품을 소장하며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앙티브(Antibes)의 피카소 미술관 [출처] https://www.antibesjuanlesp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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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발로리스( Vallauris )의 푸르나스(Fournas)

이후 도예에 빠진 피카소는 도예의 도시 '발로리스( Vallauris )'의 푸르나스(Fournas)로 작업실을 옮깁니다.

 

발로리스( Vallauris ) 의 피카소 아틀리에(Atelier) [출처] https://form-atelier.com/

 


[발로리스( Vallauris )의 피카소 국립박물관 ( National Picasso Museum )]

주소Place de la Libération, 06220 Vallauris, 프랑스

 

머무는 지역 곳곳에 많은 작품을 남긴 피카소는 이곳 발로리스( Vallauris )에도 박물관이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 "전쟁과 평화"라는 100m2가 넘는 그림을 남겼습니다. 이 작업은 그의 작업실 푸르나스(Fournas)에서 그렸는데 곡선형이 아닌 평평한 표면에서 작업했다고 합니다.

피카소 국립박물관 ( National Picasso Museum ) [출처] https://www.vallaurisgolfejuan-tourisme.fr/



5.  '라 칼리포르니(la Californie)'

다음 마지막 연인인 재클린 로크와 함께 찾아낸 집은 19세기에 지어진 넓은 정원이 딸린 칸( Cannes )의 저택 '라 칼리포르니(la Californie)'입니다. 이곳은 피카소의 그림과 사진으로도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Pablo Picasso,Picasso's Atelier in de Villa Californie in Cannes,1955
Pablo Picasso, L'Atelier de la Californie (The Studio La Californie), 1956
Pablo Picasso posiert im Jahr 1956 in der zum Atelier gewordenen Villa La Californie in Cannes [출처] https://www.arte-magazin.de/pablo-picasso/
Pablo Picasso in his atelier in Cannes [출처] https://www.mutualart.com/Artwork/
Pablo Picasso,CARNET DE CALIFORNIE 31 (ARCHES)1959

 


 

6.  프랑스 프로방스( Provence) 보브나르그(Vauvenargues) 성 

그러다가 1959년 4월 돌연히 '라칼리포르니(la Californie)'를 떠나 세잔(Paul Cezanne)의 자취를 따라 프로방스 서쪽의 외딴지역으로 찾아들어가, 14세기에 지어진 보브나르그(Vauvenargues) 성의 주인이 됩니다. 이 성은 세잔의 수많은 작품에 등장하는 아름답고 상징적인 산기슭에 위치해 있습니다. 피카소는 이곳이 자신의 마지막 집이 될 것이라고 확신할 정도로 이곳을 너무 좋아했다고 합니다. 피카소는 그 무렵 다작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로서 엄청난 명성을 얻었습니다. 

보브나르그(Vauvenargues) 성 [출처] https://perfectlyprovence.co/

 


7.  프랑스 코트다쥐르(Côte d'Azur)의 무쟁(Mougins) 노트르담 드 비(Notre Dame de Vie)

1961년 그들은 그의 마지막 아틀리에인 코트다쥐르(Côte d'Azur)의 무쟁(Mougins)으로 이주했습니다. 노트르담 드 비(Notre Dame de Vie)라고 불리는 35개의 방을 가진 이곳에서 12년 동안 살았습니다. 

무쟁(Mougins)의 노트르담 드 비(Notre Dame de Vie) [출처] https://www.gosouthfrance.com/

 



 

 

그의 연인 대해 이야기하자면, 피카소의 여성편력은 대단했다고 합니다. 나이 60, 70대가 넘어서도 스무 살 갓 넘은 어린 여자들과 살림을 차리고 자식을 낳기도 했습니다. 피카소는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렸으며, 바람을 피우기도 하고, 또 대부분의 여인들에게 헤어짐을 고했다고 합니다.

 

이 많은 여성들과 피카소의 관계는 서로의 욕구로 하여금 시작된 걸로 보입니다. 때로는 젊은 여성이 피카소의 부와 명예에 매료되거나 재능을 흠모하기도하고, 또는 화가로서의 성공을 위해 그와의 만남을 선택하기도 했지요.  반면, 피카소는 "나는 언제나 연애감정에 이끌려 그림을 그린다."라고 이야기한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는 그림에 필요한 절대적 '영감'을 위해 여성을 만나고, 또 여성을 바꾸는 것을 지속하였죠. 그는 슬퍼하는 자신의 연인을 모티브로 <우는 여인(Weeping Woman)>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아내와 연인에 대한 존중보다는 작품의 대상 혹은 모티브로서 철저히 그들을 이용한 것으로 보여지는 부분입니다.

1. Pablo Picasso,Weeping Woman, 1937 / 2.Pablo Picasso, Weeping Woman, 1937 / 3.Pablo Picasso,Cabeza de mujer llorando con panuelo (III). (Weeping Woman's Head with Handkerchief [III].), 1937

 

 

피카소는 1973년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나이 91세 되던 해였습니다. 당시 피카소는 두 번째 아내 재클린(Jacqueline Picasso)과 결혼생활을 지속하고 있었고, 그녀는 피카소의 뮤즈로서 다른 연인들보다 더 많은 400점이 넘는 그의 그림에 등장합니다. 

 

재클린 로크는 그가 죽은 지 13년 후 피카소의 생일날 그의 무덤 앞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합니다.  피카소를 혼자둘 수 없다는 이유였다는데요. 피카소의 수많은 연인들 중 한 명인 마리 테레즈 월터 또한 피카소와 헤어지고 나서 한참을 방황하다가 결국 자살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이야기는 너무나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새로운 여성을 만나고 버리기를 수없이 반복하였지만, 짧더라도 피카소가 사랑에 빠진 순간만큼은 그녀에게 많은 추억과 기쁨을 전해주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아내 재클린을 그린 그림 (Pablo Picasso, Jacqueline with flowers, 1954)와 피카소와 재클린이 담긴 사진 [출처] https://www.pablo-ruiz-picasso.net/photo-326.php
피카소와 아내 재클린, 그리고 그들의 공간 [출처] https://www.pablo-ruiz-picasso.net/photo-326.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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