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공간

욕망과 슬픔이 담긴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작품과 공간_ 오스트리아와 체코

magicalelf 2024. 3. 29. 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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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와 그의 공간,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는 1897년 빈 분리파를 결성하는데, 그 구성원 속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또 한 명의 예술가 에곤 실레(Egon Schiele)도 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의 일화도 궁금하고요. 그의 이름이 나왔으니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또 한 명의 저명한 예술가 에곤 실레(Egon Schiele)와 그의 공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할게요.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

에곤실레 (Egon Schiele)의 본명은 에곤 레오 아돌프 루트비히 실레(Egon Leo Adolf Ludwig Schiele)입니다. 그는 1890년, 오스트리아 북동부에 있는 툴른(Tulln) 기차역 건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툴른역의 역장이었으며, 어머니는 남부 보헤미아에 있는 크룸로프(Krumlov(Kramau))출생의 체코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기차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툴른(Tulln) 기차역에 재현된 에곤 실레(Egon Schiele) 생가의 모습     

주소: Bahnhofstraße 69, 3430 Tulln

 

역장의 아들로 태어나 1890년부터 10년 이상을 보낸 에곤 실레와 그의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공간입니다. 실내공간은 당시 에곤 실레 가족의 공간을 재현해 놓았다고 해요. 

Das Bahnhofsgebaude in Tulln, das Geburtshaus Egon Schieles (im zweifenstrigen Zimmer rechts im 1. Stock). Photographie. Um 1910. [출처] https://austria-forum.org/
[출처] http://www.schiele-geburtshaus.at/


      에곤 실레(Egon Schiele) 트레일(Trail)      

툴른(Tulln) 기차역에서 시작되는 에곤실레 트레일은 그가 다녔던 학교를 비롯하여 그의 흔적이 담겨있는 지역의 장소 곳곳을 연결하여 그에게 좀 더 깊게 다가가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에곤 실레(Egon Schiele) 트레일 [출처] https://www.schielemuseum.at/


     에곤 실레 박물관 (Egon Schiele Museum)     

주소Donaulände 28, 3430 Tulln an der Donau, 오스트리아

 

이곳은 톨른(Tulln)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Egon Schiele)에게 헌정된 박물관입니다.

에곤 실레 박물관 (Egon Schiele Museum) [출처] https://www.schielemuseum.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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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에곤쉴레의 가족은 클로스터노이부르크(Klosterneuburg)로 이사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매독으로 인해 생애의 마지막 몇 달을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에곤 쉴레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이후 그는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장소를 반복적으로 방문했다고 합니다. 

 

에곤 실레는 학교생활에는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학교에서 자유형 그림을 가르쳤던 존경받는 화가이자 교사인 루트비히 칼 스트라우흐(Ludwig Karl Strauch) 교수만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지원했습니다. 그는 집에서 그에게 개인 교습을 해주고 옆에 있는 이젤에 그림을 그리게 했습니다.

 

실레가 15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사망하고, 그는 친척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1906년 실레는 클림트도 한때 다녔던 비엔나의 공예학교 Kunstgewerbeschule (School of Arts and Crafts)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조형예술대학 Akademie der Bildenden Kuenste으로 보내졌고, 선생의 고집스러운 견해와 극단적 보수주의 성향에 혼란과 실망을 겪어 3년 후 결국 떠나게 됩니다. 

 

1907년 에곤 실레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자신보다 28세가 어린 젊은 화가에게 친절히 멘토역할을 해주었습니다. 클림트는 젊은 실레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고 해요. 그림을 사주고 자신의 그림과 교환하기도 했으며, 모델을 주선하기도 하고, 후원을 해줄 만한 사람에게 소개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또, 그를 분리주의와 연결되어 있는 미술공예 워크숍인 비엔나 워크숍에도 소개하였습니다. 이 시기 그의 그림은 아르누보의 영향과 함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와 에곤 실레(Egon Schiele) [출처] https://www.riseart.com/

 

에곤 실레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작품에 경의를 표하지만 신성을 모독하는 듯한 표현의 작품으로 새롭게 재창조하기도 합니다. 사랑과 열정보다는 종교적인 인물들이 서약에 반하는 모습을 보이는 작품입니다. 

에곤쉴레가 재창조한 클림트의 그림 1. Egon Schiele. Cardinal and Nun (Caress), 1912 / 2. Gustav Klimt, The Kiss (Lovers), 1907-1908

 

 

실레는 아카데미에서 3년을 마친 뒤 1909년 아카데미에 만족하지 못한 학생들과 함께 새로운 예술가 그룹 Neukunstgruppe을 결성합니다. 그해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가 회장으로 있는 전시 위원회의 “1909년 국제 미술전(Internationale Kunstschau 1909)”에 실레의 작품 4점이 전시됩니다. 그곳에서 그는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 얀 투롭(Jan Toorop),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작품을 만나게 되고,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도 만났으며, “비너 베르크슈테테(Wiener Werkstätte)”와도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작품은 괴상하고, 에로틱하며, 포르노적이고, 불안하며 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는 타인의 초상화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화상에도 집중을 하였습니다. 또한 반 고흐(Van Gogh)를 기리는 '해바라기'를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에곤 쉴레가 그린 각각 1908년과 1911년에 그린 해바라기 Egon Schiele.sun flower, 1908 / 2.Egon Schiele.sun flower, 1911

 

에곤 쉴레에게 영향을 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작품과 인생, 공간에 대한 이야기는 앞서 포스팅 한 아래 글을 참고해 주세요.

2024.03.14 - [예술가의 공간] -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와 떠돌던 그의 공간들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와 떠돌던 그의 공간들

사실 '화가의 방'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예술가는 빈센트 반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 일 겁니다. 너무나 알려져 있으며 고흐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아를의 침실 (Bedroom in Arles) '이라는 그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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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곤 실레의 아틀리에 (Schieles Atelier)     

주소:  Alserbachstraße 39, Wien IX. ,  오스트리아  

 

이곳은 에곤 실레(Egon Schiele)가 1909년 8월부터 1910년 11월까지 머물며 작업한 아틀리에입니다.

Egon Schieles Atelier in Wien IX. , Alserbachstrabe 39 (August 1909 - November 1910). Photographie. Um 1980. [출처] https://austria-forum.org/

 


 

아카데미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실레는 인간의 모습뿐 아니라 인간의 성도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1910년 그는 누드화를 연습하기 시작하며, 곧 메마르고 병적인 색깔을 띠며, 종종 강한 성적 의미를 지니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또한 어린이들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실레는 수많은 단체전에 참여하는데, 1910년에는 프라하에서 열리는  예술가 그룹(Neukunstgruppe) 전시에 참여했습니다.

 

 1911년,  에곤 실레는 발부가 윌리 노이질(Walburga (Wally) Neuzil)과 만남을 갖고 비엔나에서 같이 살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그의 작품 중 몇 개의 모델도 하게 됩니다.  아마도 발부가 윌리 노이질(Walburga (Wally) Neuzil)은 구스타프 클림트가 소개한 많은 갤러리스트, 동료 예술가 및 모델  중 한 명이었을 것이라 전해집니다.  윌리(Wally)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모델이었으며, 그의 연인 중 한 명이었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에곤 실레(Egon Schiele)와 발부가 윌리 노이질(Walburga (Wally) Neuzil) [출처] https://www.theartstory.org/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가 그린 각각의 윌리(Wally) 1. Gustav Klimt, Portrait of Wally, 1916. / 2. Woman in black stockings (Valerie Neuzil), 1913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작품, 공간, 그의 뮤즈에 대한 이야기는 이전에 다룬 적이 있습니다. 아래 링크를 참조 바랍니다.

2024.03.28 - [예술가의 공간] - 여인을 화려하게 묘사하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소박한 공간

 

여인을 화려하게 묘사하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소박한 공간

이전에 독일 출생의 현대미술 작가 버드맨(Birdman) '한스 랑그너(Hans Langner)'와 그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질병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난 후 자신의 색깔인 '금'을 발견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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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레와 윌리(Wally)는 비엔나의 환경을 답답해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남부 보헤미아에 있는 작은 도시 크룸로프(Krumau)로 떠나게 됩니다. 그곳은 실레 어머니의 고향이며, 현재 실레 기념 박물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마을사람들은 이들의 생활양식, 특히 마을의 십 대 소녀들을 억지로 모델로 고용한 것을 몹시 좋지 않게 생각하였습니다. 결국 커플은 마을사람들에 의해 쫓겨나게 됩니다.


     에곤 실레 아틀리에 (Egon Schiele atelier) - 정원집(Egon Schieles Gartenhaus)      

주소Linecká 343, 381 01 Český Krumlov 1-Plešivec, 체코

 

1911년 5월, 크룸로프(Krumau)로 와서 그의 파트너인 윌리(Wally)와 함께 살던 장소입니다. 이곳 블타바(Vltava)에 있는 정원 집은 리모델링되어 여름철에만 방문객에게 개방된다고 합니다. 그는 마을사람들로 인해 이곳에서 강제로 떠나야만 했고, 이후 간헐적으로만 돌아왔다고 합니다. 

Egon Schieles Gartenhaus [출처] https://www.ckrumlov.info/


      에곤 실레 아트 센트럼 (Egon Schiele Art Centrum)      

주소Široká 71, 381 01 Český Krumlov 1, 체코

 

옛 양조장이었던 이곳은 체코 체스키 크룸로프에 위치한 에곤 실레에게 헌정된 박물관이자 갤러리입니다. 민간 비영리 단체가 운영하고 있으며, 그의 20세기 고전 미술과 현대미술을 다루고 있습니다.이곳에는 그의  드로잉과 수채화를 비롯해 그의 삶과 작품을 다룬 다큐멘터리, 실레가 소유한 가구, 데스마스크, 실레의 유일한 조각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에곤 쉴레 아트 센트럼 (ESAC) [출처] https://de.wikipedia.org/


 

두 사람은 영감을 주는 환경과 작업을 할 저렴한 스튜디오를 찾아 비엔나에서 35Km 서쪽에 위치한 노이렝바흐(Neulengbach)로 옮겨 갑니다. 실레의 스튜디오는 노이렝바흐의 비행 청소년들이 모이는 아지트가 되었습니다. 그곳의 공간은 그의 그림으로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에곤 실레의 아틀리에 (Schieles Atelier)     

주소: Haus Au 48 in Neulengbach

 

이곳은 에곤 실레(Egon Schiele)가 잠시 머물렀던 노이렝바흐(Neulengbach)의 집이자 작업실입니다.

에곤 실레(Egon Schieles)의 노이렝바흐(Neulengbach) 작업실 [출처] https://www.noen.at/
Egon Schieles,The artist's room in Neulengbach,1911

 

실레의 생활 방식은 마을 주민들에게 심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1912년 미성년의 소녀를 유혹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습니다. 경찰들이 실레를 체포하러 스튜디오에 왔을 때 포르노라고 판단되는 그림 수백 장을 몰수하였다고 합니다. 실레는 재판을 받을 때까지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재판에서 유혹과 유괴 혐의는 기각되지만, 어린이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외설적인 그림을 전시했다는 점에서는 유죄로 인정되었습니다. 판사는 재판정에서 촛불에 그림 한 점을 태우기도 하였습니다. 이미 21일간 구속되었던 것을 고려하여 3일간의 투옥이 선고되었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실레는 갇혀있는 그곳의 어려움과 불편을 묘사하는 그림 12 점을 그렸습니다. 투옥된 후에는 죽음과 부활 같은 주제를 다루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노이렝바흐 지방 법원 (Bezirksgericht Neulengbach)      

주소: 주소: Hauptpl. 2, 3040 Neulengbach, 오스트리아

 

이곳은 1912년 에곤 쉴레가 투옥되었던 곳으로 지방법원 지하실에서 21일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 일화는 '노이렝바흐 사건'으로 알려집니다. 그가 그린 수채화 "오렌지는 유일한 빛이었다."에서는 윌리(Wally)가 감옥창문을 통해 그에게 오렌지를 보내 가지고 있는 장면이 포착되어 있는데,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복도와 감옥 문을 통해 그가 생활하던 장소를 정확히 특정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Egon Schieles, The orange was the only light, 1912

 

노이렝바흐 지방 법원 (Bezirksgericht Neulengbach) [출처] https://www.schielemuseum.at/

 

노이렝바흐 지방 법원 (Bezirksgericht Neulengbach) 감옥 블록에는 그의 흔적을 기리는 상설전시관이 있다고 합니다. 

에곤실레 뮤지엄 (Egon Schiele Museum) 상설 전시관 [출처] https://www.google.com/maps/


그는 이후 활발하게 전시활동을 벌였는데, 1912년에는 부다페스트에서의 예술가 그룹(Neukunstgruppe) 전시, 1912년 쾰른(Cologne)에서의 분리파( Sonderbund) 전시 등에 참여했습니다. 또한, 1913년에는 뮌헨(Munich)에 있는 한스골츠(Hans Goltz) 갤러리에서 단독 전시회를 열게 되며, 1914년 파리에서도 단독 전시회를 하였습니다. 

 


     에곤 실레의 아틀리에 (Schieles Atelier)     

주소:  Höfergasse 18,   Wien IX. , 오스트리아  

Egon Schieles Atelier in Wien IX. , Hofergasse 18 (Juli 1912 - Oktober 1912). Photographie. Um 1980. [출처] https://austria-forum.org/


 

 

1914년 에곤 실레는 비엔나의 교외 히칭(Hietzing, 101 Hietzinger Hauptstrasse)에 있는 곳으로 작업실을 옮깁니다. 그리고 그의 스튜디오 길 건너편에 부모님과 같이 살고 있는 에디스(Edith)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집안은 중류층이었으며, 개신교 신도였으며, 아버지는 자물쇠 장인이었다고 합니다.


     에곤 실레의 아틀리에 (Schieles Atelier)     

주소: Hietzinger Hauptstraße 101, 1130 Wien, 오스트리아

 

비엔나 XIII (Wien XIII)에 위치한  1912년 10월 ~ 1918년 10월까지 에곤 실레가 머물렀던 작업실과 그곳에서의 에곤실레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있습니다.  

Egon Schieles Atelier in Wien XIII. , Hietzinger Hauptstrabe 101 (Oktober 1912 bis Oktober 1918). Photographie. Wien. 1995. [출처] https://austria-forum.org/
Egon Schiele in seinem Atelier in Wien XIII. , Hietzinger Hauptstrabe 101, auf dem Tisch neben ihm eine Madonnenfigur. Photographie. Um 1915 [출처] https://austria-forum.org/

 

주소:  der Hietzinger Hauptstraße 114, wo Schiele am 31, Wien XIII , 오스트리아

 

에곤 실레의 작업실 맞은편에 위치한 에디스(Edith)가 부모님과 살던 집입니다.  그는 경제적, 사회적 이유 윌리(Wally)대신  에디스(Edith)를 선택하였으며, 그는 이곳에서 사망하였습니다.

Wohnung der Schwiegereltern Egon Schieles in der Hietzinger Hauptstrabe 114, wo Schiele am 31. Oktober 1918 an der spanischen Grippe verstarb. Photographie. Um 1995. [출처] https://austria-forum.org/


 

1915년 실레는 사회적으로 더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에디스(Edith)를 선택하지만 윌리(Wally)와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윌리(Wally)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그녀는 즉시 그를 떠나서 다시는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선택이 있었음에도 윌리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그는 '죽음과 소녀'를 그리게 됩니다. 에디스(Edith)의 집안에서 약간의 반대가 있긴 했지만 1915년 6월 17일, 실레의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에 그들은 결혼했습니다. 에곤 실레와 헤어진 윌리(Wally)는 1916년, 옛 애인에게 돌아와 클림트를 위해 다시 포즈를 취했다고 합니다.

Egon Schiele, Death and the Maiden, 1915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초상화는 비엔나 사회 여성 프리데리케 마리아 베르-몬티(Friederike Maria Beer-Monti)라는 또 다른 공유 주제를 드러냅니다. 그녀는 1915년에 클림트의 초인종을 누르고 그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할 수 있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그 과정은 6개월이 걸렸고, 그 기간 동안 클림트는 많은 열정을 쏟았다고 합니다. 불과 1년 전 그녀는 실레의 모델이었습니다.

에곤 실레와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각각의 프리데리케 마리아 베르-몬티(Friederike Maria Beer-Monti) 1.Egon Schiele, Portrait of Friederike Maria Beer-Monti, 1914 / 2. Gustav Klimt, Portrait of Friederike Maria Beer-Monti, 1916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고, 그는 거의 1년 동안 징병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혼 3일 후, 실레는 군 복무를 명령받았고, 프라하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실레는 동료들과 함께 전시장에서 살았으며, 에디스(Edith)는 그와 함께 가서 호텔에서 머물렀습니다. 실레의 상관은 그들이 가끔 만나는 것을 허용하였다고 합니다. 군복무 중임에도 불구하고 실레는 베를린에서 전시를 했으며, 같은 해에 취리히, 프라하, 드레스덴 등에서 성공적인 전시를 하였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러시아 포로들을 호송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이 약하고, 뛰어난 글씨 때문에 뮐링(Muehling)이라는 마을 주변에 있는 전쟁포로수용소에서 서기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포로 러시아 장교와 그의 상관인 카를 모저(Karl Moser)를 그렸는데, 이 상관은 사용하지 않는 상점을 스튜디오로 제공하기도 합니다.

Egon Schiele, A writing desk in Muhling, 1916

 

 

물론 여성의 누드가 여전히 주된 주제이기는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에는 그의 그림은 더 커지고 세밀해졌습니다. 하지만 군복무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잘 없어서, 대부분의 작품은 경치나 군 장교 같은 사람들을 간단하게 그리는 정도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모성과 가족의 주제를 실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부인 에디스(Edith)는 이 시기 여성을 그린 대부분 작품의 모델이었지만, 전쟁의 여건 때문에 많은 작품의 모델들은 남성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1915년까지 실레의 여성 누드화는 더 풍부해지기는 했지만, 많은 것들이 마치 생명이 없는 인형 같은 형태로 그려졌습니다. 그 후 그는 자연적이고 건축적인 주제들을 많이 그렸다고 합니다. 마지막 몇 개의 작품은 자위행위를 하는 포즈의 여성 누드화들입니다.

에곤실레 (Egon Schiele)와 그의 부인 에디스(Edith) [출처] https://en.wikipedia.org/
에곤 실레가 그린 그의 부인 에디스 1. Egon Schiele, Portrait of Edith (the artist's wife), 1915 / 2.Egon Schiele, Portrait of Edith Schiele with Striped Dress, Sitting, 1915

 

 

1917년 실레는 비엔나로 돌아와 다시 작품 활동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918년 비엔나에서 열린 분리주의 49회 전시회에 초대되었고, 실레의 작품 50개가 선정되어서 중앙 홀에 전시되었습니다. 또한 전시회의 포스터를 디자인하는데, 최후의 만찬을 흉내 낸 것으로 예수의 자리에 자신의 초상을 넣었습니다. 전시회는 대성공이었으며, 그 결과 실레의 그림의 가격은 높아졌고, 많은 초상화 주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18년 가을 스페인 독감이 비엔나에 도달하였고, 임신 6개월인 에디스(Edith)는 이로 인해 10월 28일 사망하게 됩니다. 실레도 3일 후 사망하게 되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28세였습니다. 이 사흘동안 그는 에디스(Edith)의 스케치 몇 점을 그리는데, 이것들이 그의 마지막 작품들입니다.

Egon Schiele, Edith Schiele sterbend, 1918

 

 

구스타프 클림트는 독일 출생이나 주로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했습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고요. 반면, 에곤 실레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며, 역장으로 근무했던 아버지가 있었고, 부르주아 집안의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어린나이에 요절한 화가이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당시 그의 예술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의 작품을 포르노라고 여기며 감옥에 투옥시켰던 미안함 때문인지... 예술활동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던 구스타프 클림트보다 에곤실레의 장소와 그의 발자취를 더욱 잘 간직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오스트리아인들에게 기억되는 그들의 흔적을 더욱 깊이 따라가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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