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공간

여인을 화려하게 묘사하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소박한 공간

magicalelf 2024. 3. 28.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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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독일 출생의 현대미술 작가 버드맨(Birdman) '한스 랑그너(Hans Langner)'와 그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질병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난 후 자신의 색깔인 '금'을 발견했다고 얘기하며, 자신의 황금기와 부활을 표현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금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나 화려한 장식적 패턴과 황금색을 주로 사용하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가 떠올랐습니다. 화려한 화면과 장식성으로 인해 패션계에서도 여전히 모티브로서 인기를 얻고 있는 그의 그림과 공간에 대해 살펴보려 합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는 오스타리아 빈(비엔나 Vienna, Wien)에서 활동한 상징주의와 아르누보 스타일의 대표적인 화가입니다. 그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Baumgarten)에서 태어났습니다. 체코(Czech Republic)의 서부지역 보헤미아(Bohemia)에서 이민 온 그의 아버지는 금세공사이자 판화가였고, 어머니는 오페라가수였습니다. 클림트의 집안은 다복했으나, 1873년 경제위기의 여파로 형편이 어려웠다고 합니다.

 

1876년, 미술이 격동하던 19세기 말,  당시 14세였던 그는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한 후 장식 회화가로서 교육받았습니다. 1883년, 졸업 후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Ernst  Klimt), 동료인 프란츠 마치(Franz Matsch)와 함께 공방을 세우고, 이후 건축물 벽면의 회화 작품 등을 제작합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지극히 전통적이고 사실적인 화풍을 보여주었습니다. 1880년 말경에는 빈에 새로 들어선 국립극장과 미술사 박물관에 장식화를 그려 건축장식 미술의 대가로 자리를 굳혔다고 합니다. 

 

1892년 그는 아버지와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으로 정신적인 동요를 겪게 됩니다. 또한 19세기말, 그는 영국, 프랑스 등에서 벌어진 인상파와 같은 진보된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을 접하고 나서, 상대적으로 낙후된 오스트리아의 미술경향과 미술협회의 보수성에 반발하게 됩니다. 이후 반 아카데미즘 운동을 펼치며, 1897년 빈 분리파를 결성하고 아르누보 미술의 거장으로 이름을 떨칩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표어를 내세워 매너리즘에 빠진 미술가협회에 맞섰으며, 당시 클림트는 '빈 분리파'의 초대회장으로 에곤 실레( Egon Schiele),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칼 몰(Carl Moll), 오토 바그너(Otto Wagner) 등 당대 오스트리아를 선도한 화가, 디자이너, 건축가들이 참여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부자를 위한 예술과 가난한 자를 위한 예술’을 일치시키고자 했고, 감각적인 예술을 추구했습니다. 아울러 모든 예술 영역의 요소들을 이용하여 종합예술작품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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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작품은 관능적인 여성 이미지와 찬란한 황금빛, 화려한 색채를 특징으로 합니다.  그는 성(性)과 사랑, 죽음에 대한 풍성하고도 수수께끼 같은 알레고리로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극적인 에로티시즘을 강조했다는 이유로 강력한 항의를 받기도 합니다. 1900년부터 1903년에는 빈 대학교 천장 패널화를 의뢰받게 되는데, 그림에 표현된 특유의 반항적/회의적 주제 의식으로 그는 큰 비난과 함께 명성을 얻기도 하며, 이 사건 이후로는 더 이상 공공작품을 의뢰받지 않았으며, 거의 작품은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양식으로 변모해 나갑니다. 

 

클림트는 빈 분리파가 더 이상 본래의 취지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음을 목격하고는 이에 낙담하고 1905년 빈 분리파를 탈퇴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른바 '황금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됩니다. 그는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의 모자이크와 장식적인 패턴, 금을 사용하여 눈에 띄는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실생활에 거리를 두고 신비로운 것과 정신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습니다. 매우 화려하고 역동적이며, 에로틱한 요소와 강렬한 상징주의 등을 지속시켜 나갔고, 덕분에 <키스>1907~1908, <다나에>1907~1908 등 이른바 '황금 시기'의 대작을 잇다라 탄생시키며 생의 말년을 화려하게 장식하게 됩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낡은 작업실     

주소: 요제프슈테터 스트라세(Josefstädterstraße) 21가, 비엔나 VIII, 오스트리아

 

Josefstädter Straße 21은 클림트가 1911년까지 사용한 작업실이라고 합니다. 1892년 그의 형제 에른스트 클림트(Ernst  Klimt) 1864~1892와 함께 이곳으로 이사했고, 동생이 요절한 후에도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1911년 철거계획으로 인해 이 작업실을 비워야 했고, 그 후 비엔나 히칭(Hietzing)의 마지막 작업실로 옮겨 가게 됩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그의 작업실, 1911 [출처] https://austria-forum.org/

 

클림트의 공간은 그의 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조셉 호프만(Josef Hoffmann) 1870~1956이 전체적인 인테리어 디자인을 구상해 꾸며주고자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클림트는 평소 작업 환경에 대규모로 개입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는 그를 위한 가구 몇 점만 만들었습니다. 

조셉 호프만(Josef Hoffmann)이 클림트를 위해 만든 의자, 1906, 그리고 레오폴드 미술관(Leopold Museum, Wien)에 재현된 클림트의 공간 [출처] https://onlinecollection.leopoldmuseum.org/


     클림트 빌라(Klimt-Villa)_ 그의 마지막 작업실      

주소Feldmühlgasse 11, 1130 Wien, 오스트리아

 

클림트 빌라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가 1911년부터 1918년 사망할 때까지 사용했던 작업실이라고 합니다. 비엔나의 히칭(Hietzing) 지구에 위치하며, 1920년대 초에 지어진 네오바로크 양식의 건물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2세', '프리데리케 맥주', '신부', '아담과 이브'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을 포함해 50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클림트 빌라(Klimt-Villa) [출처] https://www.klimtvilla.at/

 

현재 건물은 이후 소유자에 의해 확장된 형태이나, 내부에는 클림트가 사용했던 작업실이 복원,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정원 또한 클림트의 그림 일부에도 반영되어 있기에 당시의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재구성되었습니다. 2014년, 이곳은 민영회사가 운영하는 박물관으로 탈바꿈하였으며 유럽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작업실과 응접실 [출처] https://en.wikipedia.org/

 

 

구스타프 클림트는 정원을 사랑하는 '원예 애호가'였습니다. 정원 중앙에는 클림트의 그림에서 감상할 수 있는 다마스크 장미가 있는데, 소위 클림트 빌라 장미라고 불리는 장미 품종은 비엔나의 정원 전문가가 접목을 통해 재배한 것입니다.  클림트 빌라는 아름다운 화원이 내려다보이는 집이며, 클림트는 정원의 매력에 푹 빠져서 매년 식물을 옮겨 심었다고 합니다. 그는 꽃과 다채로운 색상이 넘실대는 바다와 같은 이 정원을 진심으로 자랑스러워했고 손님이 방문하면 작품이나 작업실 보다 먼저 정원을 구경시켜주곤 했습니다. 

 

이곳에는 클림트와 수많은 고양이들이 거주했다고 합니다. 그는 고양이들이 방 주변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도록 허락하며 좋아했다고 해요. 

 

클림트의 그림과 클림트 빌라의 장미정원 ( Gustav Klimt,&nbsp; The Rose Garden, 1911 )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와 고양이 [출처] https://artsandculture.google.com/


 

1918년 1918년 1월 11일 그는 안타깝게도 갑작스러운 뇌출혈을 겪게 됩니다. 일련의 합병증으로  병상에 있다가 2월 6일 오스트리아 빈에 위치한 병원에서 5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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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성과 함께라면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클림트가 남긴 말이라고 합니다. 그는 여성을 사랑하고 또 흠모했습니다. 평생 혼인하지 않았지만,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 여인들 사이에서 일곱 아이를 가졌고, 그가 세상을 떠나자 14명의 여인들이 친자확인소송을 냈다고 합니다. 많은 모델들과 관계했지만 그는 어쩌면 진정으로 안주할 여인을 찾지 못했는지도 모른다고 혹자는 짐작합니다. 그것은 그가 오히려 사랑에 관한 한 이상주의자였음을 말해주며, 이상적인 사랑은 쉽게 오지 않는 것이기에 클림트에게는 그러한 사랑을 나눌 만한 모델은 없었다고 이야기되기도 합니다.

클림트의 수많은 여인들 1. Gustav Klimt, Hope I, 1903 / 2. Gustav Klimt, Danae, 1907 / 3. Gustav Klimt,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1907

 

삶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그의 기질은 가히 전설적이었으며 그가 즐겨 열고 참석하던 호화롭기 그지없는 디너파티들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또한 상류층 여성들과 흩뿌린 무수한 연애담은 오늘날에도 무수한 추측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깃거리입니다.

 

Costume Party with Gustav Klimt ,1916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와 에밀 리 플뢰게(Emilie Floge), 1910 [출처] https://sites.barbican.org.uk/meetthecouples-klimtfloge/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와 에밀 리 플뢰게(Emilie Floge), 1909 [출처] https://www.thecollector.com/gustav-klimt-muse-emilie-floge/

 

하지만 오직 한 사람, 에밀리 플뢰게(Emilie Flöge)라는 여인은 클림트의 진정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두 사람은 1890년 경에 만났습니다. 에밀리의 언니는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Ernst  Klimt)와 결혼하지만, 1년 후 동생이 사망하자 클림트가 가족을 부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그는 매년 여름 아터제 호수(Lake Attersee)에서 플뢰게(Flöge) 가족과 함께 보내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많은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아터제(Attersee)에서 그린 클림트의 그림들 1. Gustav Klimt, Country House by the Attersee, 1914 / 2. Gustav Klimt, Houses at Unterach on the Attersee, 1916
아터제 호수(Lake Attersee)에서 시간을 보내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와 플뢰게(Floge) 가족

 

클림트가 그린 에밀리 1. Gustav Klimt, Emilie Floge, Aged 17, 1891 / 2. Gustav Klimt,Portrait of Emilie Floge, 1893

 

클림트가 에밀리를 그린 초기의 그림은 매우 전통적인 스타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에밀리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리고, 1902년, 클림트는 에밀리가 28세였을 당시의 모습을 그렸는데, 초상화에는 에밀리가 직접 디자인한 바닥 길이의 드레스를 입은 신비한 여성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상세한 장식 패턴과 사실적으로 표현된 특징이 특징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새로운 예술적 비전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에밀리의 긴 윤곽선과 나선형 장식, 금색 사각형 및 점으로 장식된 드레스는 신비로운 청록색 배경과 대조를 이룹니다. 실제로 클림트는 플뢰게(Flöge)와 협력하여 독특한 의상을 디자인하고는 했다고 기록됩니다. 이 초상화에 매료된 비엔나 상류층 사회의 많은 여성들은 비슷한 디자인과 초상화를 주문하기 위해 클림트와 에밀리의 작업실을 방문했습니다. 1904년 그녀는 자매들과 함께 플뢰게 자매(Schwestern Flöge) 살롱을 열었습니다. 그때부터 플뢰게는 비엔나에서 유행을 선도하는 패션 디자이너이자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에밀 리 플뢰게(Emilie Floge)와 그의 초상 ( Gustav Klimt, Bildnis Emilie Floge, 1902) [출처] https://terms.naver.com/

 

 

플뢰게는 클림트와 늘 함께한 정신적 반려자로 27년간 관계가 지속되었습니다. 클림트의 유언도  '에밀리에게 보내주세요!'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클림트의 명작 <키스>의 여주인공이 플뢰게라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키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Gustav Klimt, The Kiss, 1907~1908

 

 

 

구스타프 클림트는 생전에 이미 유명 작가였지만, 그가 빈번하게 그린 나체와 섹스 장면이 줄곧 문제 되어 영예로운 순간을 맞이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0여 년이 지난 1980년대 후반,  클림트의 작품들이 급부상하더니 클림트는 이제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화려한 작품과는 달리 그의 공간은 생각보다 단출하고 정제되어 있습니다. 옷차림도 소박하고 단순합니다. 남아있는 사진과 흔적으로 보면 아마도 그의 뮤즈인 에밀리 플뢰게가 그의 작품에 매우 큰 영향을 준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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