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와 떠돌던 그의 공간들
사실 '화가의 방'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예술가는 빈센트 반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 일 겁니다. 너무나 알려져 있으며 고흐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아를의 침실 (Bedroom in Arles) '이라는 그림이 떠오르기 때문이에요. 오늘은 서양미술사 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인 고흐와 수없이 떠돌며 지내던 그의 공간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위대한 탈 인상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 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
빈센트 반 고흐 ( 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는 네덜란드 화가로 원래의 이름은 빈센트 빌럼 반 고흐입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전부(900여 점의 그림과 1100여 점의 습작들)를 정신질환을 앓고 자살하기 전 10년 동안 그렸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살아있는 동안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사후에 인정받았지요. 그가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1901년 파리에서 71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였습니다.
그는 1853년 네델란드 노르트브라반트주 쥔더르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목사였고, 어머니는 부유한 가정출신이었다고 합니다. 1869년 빈센트의 큰아버지가 헤이그의 구필화랑에 빈센트의 자리를 구해줬고, 그는 화랑에서 미술교육을 받았으며, 1873년 런던 사우샘프턴가에 있는 구필화랑 런던지점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합니다.
1873년 그는 영국 램스게이트의 작은 기숙학교에서 무급교사로 근무하기도 했고, 서점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1877년부터는 목회자의 길을 걷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1880년, 빈센트의 정신에 문제가 생깁니다. 가족은 그의 정신상태를 걱정했고,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것을 권유합니다.
그해 그는 퀴엠 (Cuesmes)에서 잠시 머물며 미술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미술활동을 적극적으로 돕는 남동생 테오가 있었습니다.
퀴엠에서의 '반 고흐' (Van Gogh in Cuesmes) - 반 고흐 하우스 (Van Gogh House)
주소 : Rue du Pavillon 3, 7033 Mons, 벨기에
" Maison Van Gogh, the Marais' house "는 벨기에 몽스(Mons) 근처의 퀴엠(퀴즈메스 Cuesmes) 마을에 있는 박물관입니다. 이곳은 탄광촌으로 반고흐가 1878년 12월부터 1880년 10월까지 보리나주(Borinage)의 퀴엠에 머무는 동안의 그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장소입니다. 공간은 그 시대의 분위기로 꾸며져 있으며, 그가 그린 작품 또한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당시 반 고흐는 복음 전도자였고, 이 지역을 방문하면서 광부들의 어려운 생활환경에 직면하게 됩니다. 전도자로서의 계약이 갱신되지 않은 반 고흐는 몇 달간의 숙고 끝에 예술적인 경력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그림에 관한 책과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와 같이 그가 존경하는 예술가들의 작품 판화를 복사하여 그림을 배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곳에서 반 고흐는 자신의 예술적 사고뿐만 아니라 나중에 그의 작품 주제로서, 단순한 노동자의 일상 현실과 소박한 집 등을 표현하는 것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반 고흐가 이곳에 머물며 그렸던 그림 중 가장 알려진 작품으로는 <Les Bêcheurs>가 있습니다. 그 작품은 벨기에에 보존된 반 고흐의 가장 오래된 그림일 뿐만 아니라 보리나주(Borinage)에 대한 그의 애착을 보여줍니다.
빈센트는 학교에 소속되어 미술을 배우는 것을 싫어했고, 혼자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테오의 끈질긴 설득 끝에 1880년 브뤼셀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합니다. 1881년 그는 에텐으로 완전히 돌아와 이웃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암스테르담에 머물다가 헤이그(Hague)로 돌아왔습니다.
헤이그(Hague)에서의 '반 고흐' (Van Gogh in The Hague)
1869년 7월 30일 1869 - 1873년 5월 10일
1881년 11월 27일 - 1883년 9월 11일
빈센트 반 고흐가 헤이그에서 살았던 시기입니다. 그는 일생동안 이곳에 두 번 머물며 여러 곳을 방문했는데, 그곳은 지도로 제작되어 그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에게 그의 흔적을 따라 떠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The Hague - Van Gogh Route
During his life, Vincent van Gogh lived in The Hague twice, from 30 July 1869 until 10 May 1873 and from 27 November 1881 to 11 September 1883. He also stayed in the city a few times in between. On 30 July 1869, Vincent registered as a resident of the muni
vangoghroute.com
1869년 7월 30일, 빈센트는 헤이그 시의 주민으로 등록했습니다. 그의 삼촌 Vincent van Gogh(uncle Centt)의 노력으로 그는 국제 미술상인 Goupil & Cie에 일자리를 구하고 최연소 사무원이 되었습니다. 그 자리는 빈센트에게 많은 예술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그는 큰 열정으로 자신의 새로운 역할에 뛰어들었습니다. 회사에서 몇 년을 성공적으로 보낸 후 빈센트는 Goupil & Cie의 런던 지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그는 런던에서 영어 실력을 향상시킬수 있는 것에 대해 기대가 되는 반면, 헤이그를 떠나는 것을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런던에서 그는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2년을 보낸 후 프랑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를 방황한 빈센트는 1881년 12월 헤이그로 돌아와 예술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1881년 11월, 빈센트는 예술가 안톤 모브(1838~1888)로부터 회화 교육을 받기 위해 열정으로 가득 찬 헤이그에 왔습니다. 그곳에서 3주간의 풍요로운 생활을 보낸 후 그는 에텐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빈센트는 아버지와 논쟁을 벌였고 논쟁이 너무 치열해서 그는 곧바로 헤이그로 돌아올수밖에 없었습니다. 빈센트는 곧 자신의 스튜디오를 찾았습니다. 베르나르두스 요하네스 블로머스 Bernardus Johannes Blommers(1845~1914), 테오필 드 복 Théophile de Bock(1851~1904), 얀 헨드릭 바이센브루흐Jan Hendrik Weissenbruch(1824~1903), 헤르만 반 데르 빌레Herman van der Weele(1852~1930) 등과 같은 다른 예술가와의 접촉이 그의 예술적 발전에 기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예술가 협회 풀크리 스튜디오(Pulchri Studio)의 준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삼촌인 Cornelis(Cor)Marinus van Gogh(uncle Cor, 서신에서 종종 C.M.이라고 함)로부터 도시 풍경을 그리는 첫 번째 유료 커미션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림으로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헤이그에서의 생활과 함께 스헤베닝겐(Scheveningen)에서 일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헤이그에서의 시절은 그의 예술 경력에서 강렬한 시기였으며, 열심히 일했지만 수입은 거의 없었습니다. 자신은 예술가이고 가능한 한 많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성공할 것이라는 그의 확신은 일상생활의 가혹한 현실과 충돌했습니다. 그는 자주 서신을 주고 받았던 형제 테오의 재정적 지원에 의존했습니다. 빈센트가 거리에서 만난 임신한 매춘부 Clasina (Sien) Maria Hoornik과 연루되자 형제간의 사이는 긴장되었습니다. 결국 빈센트는 1883년에 헤이그를 떠나 물가가 덜 드는 드렌테(Drenthe)시골로 이사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시엔을 그녀의 아이들과 함께 도시에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1883년 네델란드 북부의 드렌테주로 이사했지만,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12월, 그는 노르트브라반트주 뉘넌의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빈센트는 뉘넌(Nuenen)에서 그림에만 몰두했다고 합니다. 집 밖에서 소재를 찾고 짧은 시간 안에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직조공과 시골집에 대한 일련의 작품들이 이 시기에 완성되었습니다. 1885년 그의 아버지가 사망했고, 그 이후에는 정물화를 여러 점 남겼습니다.
뉘넌(Nuenen)에서의 '반 고흐' (Van Gogh in Nuenen )
뉘넌(Nuenen)의 목사관
주소: Berg 26 5671 CC Nuenen, 네덜란드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목사였던 아버지와 말다툼을 한 뒤 2년 동안 부모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1883년에 목사관에서 다시 그들과 함께 이사했습니다. 빈센트는 뉘넌의 농민 및 직공들과 잘 지냈고, 지역 주민에게 미술 수업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목사관 정원은 일 년에 몇 번만 대중에게 공개됩니다. 하지만 정원을 지나서 울타리를 통해 들여다볼 수도 있습니다. 반 고흐가 그림을 그렸던 그의 아름다운 뒷마당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뉘넌 곳곳에 빈센트의 그림에 등장하는 건축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1886년 빈센트는 안트베르펜의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고등부 입학시험을 본 후 수업에 참석하게 되었지만 교수들의 지도를 따르지 않아 마찰을 빚었고, 결국 추방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같은 해 그는 아카데미를 떠나 파리(Paris)로 이사를 하고 몽마프트르에 있는 동생 테오의 아파트에서 함께 살며 페르낭 코르몽(Fernand Cormon)의 화실에서 잠시 공부를 합기도 했습니다. 빈센트와 테오는 그해 르삑( Rue Lepic ) 54번지에 더 큰 아파트를 얻어 이사했지만, 곧 또 아니에르쉬르센 (Asnières-sur-Seine)으로 터전을 옮깁니다.
파리에서의 '반 고흐' (Van Gogh in Paris )
빈센트 반 고흐는 파리에서 2년을 보냈습니다. 그 당시의 파리는 세계의 비전을 포괄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예술가들에게 휩쓸려 있던 곳으로, 젊은 네덜란드 예술가의 인생에서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1886년 봄에 그는 파리의 미술상인 그의 남동생 테오와 함께 살기위해 25 Rue Victor Masse에 있는 작은 아파트로 이사했습니다. 두 달 후 그들은 Rue Lepic 54번지에 있는 더 큰 아파트로 이사했습니다.
다른 많은 예술가 및 상인과 마찬가지로 반 고흐 형제도 몽마르트르를 선택했습니다. 파리 북쪽 가장자리이자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한 몽마르트르는 파리의 다른 지역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곳은 바, 카페, 레스토랑으로 가득 차 있었고 동료 예술가, 배우, 가수와 댄서, 매춘부가 거주했습니다. 자유로운 곳이었지요. 19세기 몽마르트르는 저렴하고 편안한 파리지앵 생활을 제공했습니다.
아스니에르 (Asnières)는 기차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당일치기 여행자들은 강둑과 라 그랑드 자트(La Grande Jatte) 섬에서 피크닉을 즐기기 위해 그곳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은 노를 저으며 수영하고 자연을 즐겼습니다. 숙녀들은 파라솔을 들고 산책했고 신사들은 모자와 낚싯대를 들고 물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카페와 레스토랑이 많이 있었고, 사람들이 춤추고 식사하는 여유로운 곳이었다고 합니다.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대적 상황에 화가들에게 이 지역은 하루를 즐기는 관광객들이 모이는 특히 매력적인 장소였습니다.당시 반 고흐는 몽마르트르 지역의 54 Rue Lepic에 살았습니다. 아스니에르(Asnieres)까지 걷는 길은 5㎞였는데, 1887년 5월 초부터 7월 말까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매일 그 길을 걸었고, 그곳에서 약 40점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 시기, 화가 쇠라(Seurat), 모네(Monet), 시냐크(Signac), 앙그랑(Angrand), 바르나르(Barnard)도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아니에르쉬르센(Asnières-sur-Seine)에 있는 동안 빈센트는 센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포함하여 공원, 식당 등 여러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1887년 테오와 빈센트는 파리에 막 도착한 '폴 고갱'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888년, 2년 동안 200점 이상의 그림을 그린 빈센트는 요양을 위해 파리를 떠납니다.
아를(Arles)에서의 '반 고흐' (Van Gogh in Paris )
그 당시 고흐는 프랑스 부슈디론(Bouches-du-Rhône)의 아를(Arles)에 있는 Place Lamartine 2번지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곳은 '노란 집'이라 불리며 고흐의 그림에도 남아있습니다. 아쉽게도 그 집은 20세기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인해 파괴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아래 그림은 '노란 집'에 있는 반 고흐의 침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방은 직사각형이 아니라 사다리꼴 형태의 방이었습니다. 오른쪽 문은 위층과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해요. 왼쪽 문은 그가 고갱을 위해 준비한 객실의 문이었고요. 앞벽의 창문에서는 라마르틴 광장(Place Lamartine)과 공공 정원이 내려다보였다고 합니다.
고흐와 고갱은 함께 작업실을 사용하기로 하며 9주 동안 함께 작업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성격차이와 그림에 관한 관점차이가 일어나면서 이 공동생활은 실패할 운명이었습니다. 고흐는 밀레의 영향을 받아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을 좋아한 반면, 고갱은 기억에 의존해서 창의적으로 그리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이런 두 사람의 관점 차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아를에서 고흐가 친하게 지낸 카페 여주인 '지누'의 초상화였습니다. 고흐가 그린 지누의 초상화는 인간 내면의 순간을 포착하려는 의도였던 반면, 고갱은 지누를 마치 남자를 유혹하는 창녀 같은 인상으로 그려냈지요. 리얼리즘이었던 고흐는 이런 고갱의 그림 창작 스타일을 왜곡이라고 생각했으나 처음인지라 그냥 넘겨버리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어느 날, 갑자기 고갱은 떠나겠다고 선언하고 짐을 싸고 나갔으며, 그날 밤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잘랐습니다.
그날의 스토리는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그림과 관련이 있습니다. 고흐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거의 대부분 뚜렷한 눈동자를 보여주지만, 고갱이 그린 고흐는 흐리멍텅한 모습으로 보였기에, 고흐는 고갱이 자신을 제정신이 아닌 거라고 조롱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고흐는 술집에서 고갱과 술을 마시다가 술잔을 집어던지는 걸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지요. 고갱의 회고에 의하면 고흐가 면도칼을 들고 자신을 노려보며 나타났다고 합니다. 자신을 찌를 듯해 보였지만 노려보기만 하고 나가버렸다고 했지요. 그 뒤에 귀를 자른걸로 보이며, 잘라낸 귀를 여러 겹의 화장지와 신문지에 싸고 고갱과 고흐 둘 다 안면이 있는 아를의 사창가에 있는 매춘부 집에 찾아가 "잘 보관하고 나를 기억해 줘."라고 하면서 건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흐가 귀를 자른 일에 대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여러 의견이 분분합니다.
고흐는 매춘부의 신고를 받고 도착한 경찰에 의해 붙잡혔고, 아를 시립병원에 입원했다가 이듬해 1889년 퇴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2월 그는 다시 입원하게 되지요. 그리고 1889년, 태오의 도움으로 그림을 그리며 지낼 수 있는 환경의 생레미 생폴 요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0년 7월 29일, 고흐는 정신병으로 인한 자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고흐가 정말 자살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여러 해석이 있다고 합니다.